Sonata for Cello and Piano in G minor, Op.65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G단조
쇼팽은 거의 피아노를 위한 작품만을 작곡한 초기 낭만주의 음악의 선구자였습니다. 그는 피아노 이외의 악기를 위한 작품, 즉, 첼로를 위한 작품을 몇 곡 작곡했는데 그의 초기에 집중 되어 있으며, 중기 이후에는 오직 피아노 독주곡을 표현의 장으로 삼아 자신의 음악성을 추구해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만년인 1845년 가을에 쇼팽은 그의 마지막 주요작품인 첼로 소나타의 작곡에 착수하게 됩니다. 그 배경에는 당시의 프랑스의 뛰어난 첼리스트였던 그의 오랜 친구, 프랑숌(Auguste Joseph Franchomme)이 있었습니다. 쇼팽은 이미 젊은 시절에 첼로가 들어간 작품을 몇 개 썼는데, 그중 1832년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대2중주곡 Grand Duo for Cello and Piano" 에서는 그 무렵 갓 알게 된 프랑숌이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프랑숌은 파리 시절의 쇼팽을 여러 면에서 뒷받침해 주었는데 쇼팽은 이 소나타를 프랑숌의 첼로와 자신의 피아노 표현능력이 최고로 발휘될 수 있도록 작곡했습니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첼로와 피아노의 표현력을 깊이 탐구하면서 그는 1년 넘게 이 작품을 다듬어 이듬해인 1846년에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이 소나타는 프랑숌에게 헌정되었습니다. 이 곡을 작곡하던 때는 시기적으로는 조르주 상드와의 사이가 점점 악화되고 체력적으로도 쇠약해졌던 무렵에 해당되는데, 그런 상황 속에서도 추구되었던 만년의 양식이 이 첼로 소나타에서도 확실히 드러 납니다. 음악가 사이의 우정과 그런 만년의 작품의 심화가 결부됨으로써 그가 도달한 최후의 경지를 보여주는 대작이 탄생한 것입니다. 실제로 이 소나타는 쇼팽이 생존해 있는 동안 출판된 마지막 작품이 되었습니다. 1847년 3월 23일 쇼팽의 자택에서 프랑숌의 첼로와 쇼팽의 피아노로 연주되었으며, 공식적으로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848년 2월 16일 플레엘(Pleyel) 홀에서 초연되었는데, 쇼팽에게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연주회였습니다. 프랑숌과 함께 한 이 연주회에서는 전곡 약 30분의 반에 해당 하는 제1악장이 생략되었습니다.
연주자 : 폴 토르틀리에,Paul Tortelier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첼리스트. 폴 토르틀리에는,우리에게는 주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음반으로 알려진 연주자인데,이제는 그저 '지난 시대의 연주자' 정도로 인식되며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당대의 프랑스 음악계를 대표하는 첼리스트라 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의 음색은 로스트로포비치와 약간 닮아 있지만,그보다는 훨씬 풍부하고 울림이 깊은 소리를 낸다. 그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1960년대 초반에 Angel 에서 녹음했다. 그의 바흐 연주는 리듬에서 두드러진 개성을 나타냈는데,무곡에서 그가 표출하는 리듬은 '원초적' 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춤을 재현시키며,다른 연주자에게서 쉽게 들을 수 없는 두드러진 개성이다. 이러한 개성은 역시 완벽한 기교의 뒷받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토네이션에 있어서도 그의 설정은 생생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의 연주에서 '지니침'이 보이지는 않는다. 다시말해서 '음악적 컨트롤'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무언가 폭발할 듯 싶은데 그게 그렇질 않다. 빠른 악장에서 그토록 대담하고,느린 악곡에서 그렇게 짙은 서정이 뿜어지는데도 명확한 억제선이 설정된 듯 싶다. 폭발이 없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토르틀리에의 바흐를 감상하는 포인트일 것이다. 폴 토르틀리에는 1914년 3월 21일,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능을 나타냈으나 가정이 매우 어려워 상당히 어렵게 공부하였다. 그 배경에는 어머니의 눈물겨운 고생이 함께 했다. 어릴적 부터 첼로를 익혔고,10세 때에 파리음악원에 입학하여 제라르 에킹(Gerard Hekking)을 사사하였고,1930년 16세 때 1등상을 받고 졸업했다. 이해 12월 파리에서 데뷔하였고,장 위보와의 듀오나 라무뢰 관현악단과 콜론관현악단의 독주자로서 활동하였다. 한편,파리 음악원에서는 공부를 계속해 장갈론과 노엘 갈론에게 대위법과 작곡을 배웠고,1935년에는 화성학 부문에서 1등상을 수상했다. 이해 몬테카를로의 오케스트라의 수석 첼로 주자가 되었고,1937년부터 1939년까지 보스턴 교향악단, 이어서 파리 필하모니 협회 관현악단,더욱이 1945년부터 1946년까지는 파리 음악원 관현악단의 수석을 역임하게 되었다. 1947년 이후는 독주자로서의 활동에 전념하였고,이해 토머스 비첨 경이 지휘한 로얄 필하모니와 R.슈트라우스의 [돈 키호테]를 협연함으로써 영국에 데뷔하였다. 이것은 레코드(EMI의 SP 음반)에도 녹음되어 있는데,이는 그의 이름을 국제적으로 높이게 하였으며, 그 이후 유럽 여러 나라에서 널리 활약하였다. 1950년 프라도에서 시작한 카살스 음악제에도 연속 출연했으며,미국에는 1952년 뉴욕에서 프랑크 마르탱의 <바라드>의 초연을 함으로써 데뷔하였다. 1955년부터 1년간 가량 이스라엘에서 은퇴 생활을 했으나,1936년 파리 음악원의 첼로과 교수로 임명되었는데,그 후 12년간이나 그 자리에 있으면서 많은 영재를 키웠다. 또 1956년부터는 오케스트라의 지휘 활동을 시작하였는데,그 최초의 기회는 이스라엘 필하모니의 연주회였다. 파리의 라무뢰 관현악단을 오랫동안 지휘하였고,영국 실내관현악단과 그 밖의 유럽 여러 오케스트라에도 종종 객원 지휘를 하였다. 1965년에는 옥스퍼드의 바흐 음악제도 지휘자로서 출연하였다. 1971년 파리를 떠나 서독 에센의 폴크방 슐레의 교수가 되었다. 카살스,메뉴힌,켐프,마르탱과 그 뜻을 같이하여 음악 그 본래의 정신을 되찾자는 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한 바가 있다. 토르틀리에가 성공을 거두기까지 배의 요리사까지 마다 않고 뒷바라지한 어머니가 있었다. 토르틀리에가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유난히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것이었을까? 그는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상심,연주 활동을 잠시 중단했다. 전쟁이 끝난 후 2년이 지난 194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연주활동을 제대로 시작했다. 그는 해를 거듭할수록 기술을 연마하고 개혁하는 대기만성형의 연주가로서,새로운 기술은 그의 역동적이고 정열적인 라틴민족의 본질과 어울려 후대에게 전달되었다. 필요하다면 전통과도 과감히 맞서 새로운 장점을 증명하고 반영했다. 그는 첼로 연주시의 몸 움직임을 세밀하게 분석했다. 악기를 보다 수평으로 잡는 것이 음의 울림을 좋게 만들며,보잉을 더욱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 구부러진 엔드 핀을 고안하기도 했다. 이는 일명 ‘토르틀리에 핀’이라 불리는데,그와 친교가 있던 로스트로포비치는 이를 도입해 모스크바 음악원에 보급하기도 했다. 그는 1년간 라무뢰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도 있었고 작곡활동도 했다. 그 수많은 작품 중의 하나인 [두 개의 첼로를 위한 협주곡](1951년 다름슈타트 현대 음악제에서 초연)을 뛰어난 첼로 주자인 부인 모드 마르탱과 함께 종종 연주하였다. 그들의 아들인 얀 파스칼은 바이올린 주자인 동시에 지휘자이며,큰딸 마리아 드 라 포우(카잘스에 유래한 명명)는 피아니스트,막내 딸 포몬은 첼로 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남긴 레코드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에인절),비발디와 바흐의 [첼로 소나타>(에라토), 포레의 첼로 소나타] 2곡,R.슈트라우스의 [돈 키호테](켐페 지휘),랄로와 생상스의 [첼로 협주곡](이상 에인절)과 슈만의 [첼로 협주곡](샬프라텐)등 많은 음반이 있다. 부자(父子)가 공연한 것에는 [토르틀리에 첼로 명곡집](에인절)과 생상스와 라벨의 [피아노 트리오](EMI) 등이 있다. 그의 지휘는 그리그의 [두 개의 슬픈 선율](에인절)을 통해 들을 수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