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男, 美聲의 가수 손인호씨는 "얼굴 없는 가수"였다.
"비 나리는 호남선", "울어라 기타줄", "해운대 엘레지", "하룻밤 풋사랑", "한 많은 대동강" 같은 우리의 50~60년대를 대표하는 숱한 노래들을 히트시키며 10여 년간 정상에 서있는 동안에도 방송무대에 전혀 서지 않았다. 심지어 일반무대에서 조차 볼 수 없었다.
그의 본 직업은 영화 녹음기사였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 "로맨스 빠빠", "빨간 마후라", "미워도 다시 한번"
등이 모두 그가 녹음작업을 한 영화들로 한양스튜디오의 책임자였던 그는
대종상 녹음상을 무려 일곱 차례나 수상했을 만큼 영화 녹음작업에 있어
독보적 위치에 있었다. 보릿고개 시절, 라디오와 영화가 국민들에게 최고의 오락수단 이었던 시절, 그 두 무대를 동시에 장악한 인물로 "소리의 마술사" 라고 까지 불리던 손인호씨는 속칭 "38 따라지" 이다.
본명 손효찬(孫孝燦).
이 때 심사위원장으로부터
"가수가 되려면 이남으로 가야 소질을 살릴 수 있다" 는 권유를 받고 남행을
결심,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2월 여섯 살 터울의 형과 단둘이 서울로 내려
온다.
그는 당시 작곡가 김해송씨가 이끌던 "KPK악단" 에서 실시한 가수모집에
응모, 참가자 3백 명 중 1등을 차지해 악단생활을 시작했고 이어 윤부길씨가
이끌던 "부길부길쇼단" 에서 가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 무렵 많은 음악인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작곡가
박시춘씨...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