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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男, 美聲의 가수 손인호씨는 "얼굴 없는 가수"였다.
"비 나리는 호남선", "울어라 기타줄", "해운대 엘레지", "하룻밤 풋사랑", "한 많은 대동강" 같은 우리의 50~60년대를 대표하는 숱한 노래들을 히트시키며 10여 년간 정상에 서있는 동안에도 방송무대에 전혀 서지 않았다.
심지어 일반무대에서 조차 볼 수 없었다.

그의 본 직업은 영화 녹음기사였다.
그는 가수로써 약 150여곡의 노래들을 발표했지만 영화 녹음기사로써는 무려 2천여 편 이상의 영화 녹음작업을 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 "로맨스 빠빠", "빨간 마후라", "미워도 다시 한번" 등이 모두 그가 녹음작업을 한 영화들로 한양스튜디오의 책임자였던 그는 대종상 녹음상을 무려 일곱 차례나 수상했을 만큼 영화 녹음작업에 있어 독보적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한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 손인호씨가 가수로써 받은 상은 단 한차례도 없다.

보릿고개 시절, 라디오와 영화가 국민들에게 최고의 오락수단 이었던 시절, 그 두 무대를 동시에 장악한 인물로 "소리의 마술사" 라고 까지 불리던 손인호씨는 속칭 "38 따라지" 이다.

본명 손효찬(孫孝燦).
1927년 평북 창성에서 출생해 창성보통학교 6학년 때, 수풍댐 건설로 마을 일대가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가족 모두 만주 長春으로 이주해 생활했다.
해방 후 신의주로 옮긴 손인호씨는 평양에서 열렸던 이북 도민 전체 노래 자랑대회인 "관서콩쿠르대회" 에 참가,"집 없는 천사" 를 불러 1등을 차지한다.

이 때 심사위원장으로부터 "가수가 되려면 이남으로 가야 소질을 살릴 수 있다" 는 권유를 받고 남행을 결심,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2월 여섯 살 터울의 형과 단둘이 서울로 내려 온다.
"환영합니다" 라는 플래카드가 시내 곳곳에 걸려 있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그들 몸에 뿌려진 것은 DDT, 즉 살충제였다.
나이가 어려 곧바로 수용소에서 생활을 시작해야했던 그는 당시 서울생활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사람은 1주일 동안 굶어도 물만 먹으면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고 회고할 정도다.

그는 당시 작곡가 김해송씨가 이끌던 "KPK악단" 에서 실시한 가수모집에 응모, 참가자 3백 명 중 1등을 차지해 악단생활을 시작했고 이어 윤부길씨가 이끌던 "부길부길쇼단" 에서 가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곧이어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는 군예대에 들어가 "군번 없는 용사" 로 전쟁터를 누볐다. 제대 후 공보처 녹음실에 입사한 그는 "대한뉴스" 녹음을 담당하며 아울러 영화 녹음기사로 활동을 시작한다.

그 무렵 많은 음악인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작곡가 박시춘씨...
이 인연으로 그는 노래 두 곡을 받아 취입하게 되는데, 그 곡이 바로 "나는 울었네" 와 "숨쉬는 거리" 이다.
휴전 이듬해인 1954년의 일이다.
최근 수려한 용모의 아들 손동준이 그를 이어 가요계에 얼굴을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