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윈 폴리오(Twin Polio)
결성 : 1967년 11월 데뷔 : 1969년 멤 버 : 송창식(1947년 2월 20일), 윤형주(1947년 11월 19일), 이익근 국내에서 최초로 세대간의 경계선을 그은 음악 장르는 포크다. 포크 음악 부흥(Falk Revival)을 통해 포크록이란 장르를 탄생시킨 이 미국의 민요는 비록 그 뿌리가 우리와는 상관없는 것이지만, 그 취지만은 살아남아 '70년대 저항과 반항의 정신을 뿌리 내리는데 중추적 역할을 해냈다. 그리하여 운동권이란 이름의 민주 투쟁과 더불어 음악 역사상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되었으며 맥주와 청바지, 통기타로 상징되는 젊은 문화의 박제가 되었다. 포크 음악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 전, 우리의 대학생들은 음악 감상실을 통해 자웅을 겨루며 이미 폭넓은 인프라를 구축해 나가고 있었다. <세시봉>, <오빈스 캐빈> 등을 통해 이장희, 윤형주, 조영남, 이익근, 강근식, 유종국 등의 캠퍼스 스타들이 진을 치고 있었으며 이후 포크를 몇 단계 끌어올린 최초의 창작 음악인 한대수, 김민기, 양희은, 서유석 등, 당대를 주름잡은 많은 스타들이 이 자리를 거쳐갔다. 이 중 남성 포크 듀오 트윈 폴리오는 그 감미로운 하모니를 주무기로 국내 최초의 포크 앨범을 발매해 장안에 충격타를 던졌으며 이 장르가 급속도로 젊은이들 사이에 퍼져나가도록 만든, 결정적 역할을 했다. 트윈 폴리오는 듀오가 아닌 트리오로 시작됐다. 무교동의 <세시봉>에서 <대학생의 밤>이란 코너의 사회를 맡고 있던 이상벽의 소개로 청중 앞에서 노래를 부르게된 송창식은 팝 음악을 자유자재로 요리하는 연대 포크 트리오 라이너스의 멤버인 윤형주의 솜씨에 반해 이익근 과 더불어 트리오 조직을 제안한다. 이들은 가게 이름을 딴 세시봉이란 팀명으로 각종 라디오에 출연하며 '하얀 손수건'이란 곡을 히트시켰지만 몇 달 후 이익근의 군입대로 둘 만 남게 된 송창식과 윤형주는 팀 이름을 트윈 폴리오로 정하고 새롭게 활동을 시작했다. 부잣집 아들이자 명문대생인 윤형주와 성악을 전공했지만 방 한 칸 없어 떠돌이로 생활하던 송창식의 드라마틱한 만남은 이후 두고두고 '불가사의한' 사건으로 전설처럼 내려져 오고 있다. 이미 대학가를 중심으로 젊은이들의 절대적인 환대를 받고 있던 이들은 몇 차례의 성공적인 리사이틀(당시에는 콘서트를 이렇게 불렀다) 후 펄 시스터즈, 박연숙과 함께 한 <김인배 작곡편곡집>이란 앨범을 발표한다. 이미 인기곡이 되어버린 '하얀 손수건' 등 당시 음악 감상실에서 연주하고 부르던 6곡의 번안곡은 대학생뿐만 아니라 여학생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으며 한정돼있던 인기를 전국으로 퍼져나가게끔 도와주었다. 이들의 목소리에 반한 당시 경기여고 2학년생 양희은은 자신의 특활반에 이들을 초대하기도 했다. 이들의 첫 앨범은 역사적으로 포크음악을 완벽한 메인스트림으로 자리잡는데 공헌을 한 앨범이다. 전 곡을 번안곡으로 수록한 이 앨범은 초창기 포크의 외국 의존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지만, 당시의 젊은 정서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이기도 하다. '하얀 손수건'외에 '축제의 밤', '고별', '웨딩 케익' 등이 크게 히트했으며 각종 방송 출연과 리사이틀로 인기는 절정을 구가했다. 이 앨범은 당시의 주류이던 최희준, 이미자와 같은 가수들에게 내미는 도전장과도 같은 것 이였으며 기성세대와 젊은 층의 간극을 확실하게 벌렸던 충격적인 사건 이였다.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 기타가 하나의 유행이 되도록 만든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앨범이다. 1969년 12월, 화려한 불꽃처럼 타오르던 이들은 갑작스런 팀 해체를 발표한다. 집안의 반대로 짬짬이 활동했던 윤형주가 학업을 위해 경희 의대 본과로 학교를 옮겨야 했기 때문이였다. 아마도 이 충격적인 선언은 비틀즈(Beatles)의 해체나 서태지와 아이들의 그것만큼이나 이 땅의 젊은이들을 잠 못 들게 했을 것이다. 12월 21~22일 양일간 드라마센터에서 개최했던 마지막 공연은 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마치 서태지와 아이들의 마지막 인사와도 같은 윤형주의 “이제 우리 트윈 폴리오는 그만 해체하려 합니다”라는 멘트는 수많은 10대 소녀 팬들의 가슴에 커다란 멍 자국을 심어놓았다. 공연 도중 송창식이 신중현의 '떠나야할 그 사람'을 부를 때 두 멤버는 부둥켜안고 참고있던 눈물을 떨어뜨렸으며 복받치는 감정을 추스릴 수 없었던 팬들 역시 울음을 터트렸다. 이후 이들의 공연은 마치 바브라 스트라이잰드(Barbra Streisand)의 끝나지 않고 되풀이되는 은퇴 공연처럼, 계속 이어져 무려 6차례나 비공식적인 고별공연이 있었으며 MBC, TBC 등의 공중파 방송들도 5차례나 고별공연을 방송하며 식지 않는 인기를 보여주었다. 은퇴공연 직후 <튄폴리오 리사이틀>이란 음반을 발표(이 앨범은 이후 세 차례 재판을 찍었다)나 했던 이들은 해체 후에도 가끔 주위의 요청으로 몇 곡씩 행사장에서 노래를 불렀으며 조영남과 함께 <크리스마스캐롤음반>, <조영남 리싸이틀쇼> 등을 발표했다. 해체 후 송창식은 솔로가수로 국내 최고 가수의 반열에, 윤형주는 최고의 작곡가 입성에 성공해 인기 스타로서 시대를 풍미한 이들은 1981년 기존의 음반과 비슷한 레퍼토리에 윤형주가 작사·작곡한 '축제의 밤', 송창식의 '우리', 에벌리 브라더스(Everly Brothers)의 'Crying in the rain'을 리메이크한 '빗속을 울며' 등을 추가해 앨범을 발표했다(이들의 해체를 끝까지 인정하지 못했던 팬들에게 위로가 된 앨범이다). 1982년엔 '편지', '축제의 노래' 등이 수록된 금성사 판촉 카세트테이프를, 1988년엔 김세환과 더불어 책자가 들어있는 <하나의 결이 되어> 박스음반발표에 따른 기념공연을 열며 에벌리 브라더스,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 Garfunkle)에 필적할만한 화음을 선도했던 실력이 사그라들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이때부터 셋은 전국을 순회하는 콘서트를 주기적으로 가지며 아직까지도 포크의 전성시절을 잊지 못하는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