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chael Jackson(마이클 잭슨)

▣ 본명 : 마이클 조 잭슨 (Michael Joe Jackson)
▣ 생년월일 : 1958년 8월 29일
▣ 고향 : 미국 인디애나주 게리시
▣ 가족 : 조잭슨과 캐더린 잭슨 부부의 9남매 중 다섯 번째

▣ 소속 레이블 : 소니뮤직
▣ 발표 앨범
Off The Wall (1979년),
Thriller(1982년)
Bad (1987년),
Dangerous (1991년),
HiStory (1995년)
Blood On The Dance Floor - HiStory in the Mix 등 수없이 많음.

'팝의 황제' 마이클잭슨!

무엇이 오늘의 그를 있게 한 것인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부모의 힘이다.
클라리넷 연주가였던 어머니와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던 아버지는 일찍부터 아이들에게 악기를 한가지씩 배우게 했으며, 레이 찰스에서부터 비틀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레퍼토리를 섭렵하도록 했다.
이렇게 일찍부터 어린 마이클의 재능을 간파해 잭슨 파이브를 결성시킨 아버지 못지않게 '황금의 손'으로 불리는 퀸시 존스 또한 오늘의 마이클 잭슨을 있게 한 중요한 인물이다.

마이클 잭슨은 1958년 8월 29일 미국 북부 지역인 인디애나주 게리시에서 9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마이클 잭슨의 본명은 Michael Joe Jackson인데, 이것은 그가 운영하는 MJJ 프로덕션의 이니셜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분명 하늘이 내린 축복을 받고 태어난 듯, 마이클의 부모는 어려운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버지 조셉은 철강소에서 크레인 기사로 일했는데 밤에는 팰컨스라는 블루스 밴드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어머니 캐서린은 보컬리스트이자 클라리넷 연주가이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고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감당 못할 정도로 식구가 늘자 음악에 쏟았던 열정이 차츰 식었다.
그러던 중 집안 분위기 탓이었는지 조셉의 9남매는 거의 음악에 남다를 재능을 보였고 그중 거침없이 유명 가수의 노래를 따라부르는 당찬 꼬마 마이클의 재능은 그의 아버지로 하여금 무한한 교육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조셉은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치고 스파르타식으로 춤과 노래를 연습하게 했다.
당연하게도 형제 그룹의 메인 싱어는 마이클의 차지가 되었는데, 당시 다섯 살이던 마이클은 대부격인 제임스 브라운의 목소리와 춤을 흉내낼 수 있었고 유명 R & B가수들도 독특하게 모방할 수 있었다.
너무나 엄격하고 혹독한 연습과 스테이지 매너 익히기가 이어졌는데 조셉으로서는 아들들의 부업으로 경제적 부담을 덜어보자는 데에도 목적이 있어서 더욱 심해지기도 했다.

"학교에 갔다 집에 돌아오면 매일 아버지는 연습 채비를 끝내고 형제들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버지는 우리들이 완벽하게 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연습을 시키곤 했어요. 오후 3시부터 시작한 것이 한밤중까지 이어질 때가 많았습니다.
아마 하루에 7시간 이상씩 연습했을 거예요. 우린 정말 불만을 터뜨리고 싶었던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고 집을 나가고도 싶었어요."

마이클은 이렇게 회상하고 있는데 그때의 앙금이 남아 아직도 부자지간은 약간 서먹한 편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마이클은 한 공연에서 "아버지를 용서한다." 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러나 어린 시절 잭슨파이브 내에서 활동하던 그의 모습은 유년시절의 추억으로 족하다. 'King of Pop'으로 부상하는 시절이 오는 것이다.

마이클은 소년기에 맑고 청아한 미성으로 높은 인기를 구가하였다.
몇해 전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가 리메이크해 발표한 'I'll be there'는 본디 마이클의 미성으로 불렸던 노래이다. 그러나 사춘기가 오자 남자로서 변성기를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마이클은 시련을 딛고 일어났다.
1979년 솔로 독립을 선언하며, 황금의 손 퀸시 존스의 도움으로 대망의 첫 솔로앨범 [Off the Wall]을 발표한다. 미국내에서 800만장이라는 판매고를 올렸으며 그래미 최우수 R&B 퍼포먼스를 수상했다.
바로 이 시점 마이클은 무대공연 도중 제자리에서 도는 동작을 취하다가 심하게 넘어져 코뼈가 부러져 버리고 만다. 이후로 수차례의 성형 수술을 받게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백인처럼 되기 위하여 성형수술을 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뜬소문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그런 수술은 의학적으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피부가 흑인임에도 불구하고 하얀 것은 백반증이라고 하는 피부병에 걸렸기 때문인데, 피부의 색깔이 군데군데 빠져 얼룩이 생기고, 심하면 온몸에 커다란 얼룩이 생기는 병인데, 자외선 자극에 특히 민감하여 마이클은 늘 선글라스를 쓰고 검은 우산을 쓰고 다니는 것이다. 화장을 두껍게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다음으로 나온 앨범이 82년의 [Thriller]인데, 이것이야말로 바로 마이클을 'King of Pop'으로 만들어준 음반이다.
총 9곡 중 모든 곡이 Billboard No.1 또는 Top 10에 들어갔다. 5,200만장의 판매고로 기네스북 1위에 올랐다. 하지만 지금도 계속 판매되고 있는 앨범이다. 26회 그래미 시상식에서 8개 부문을 휩쓰는 대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는 이제 노래뿐 아니라 화려한 의상과 문 워킹(Moon Walking)을 선보이며 격렬한 춤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동시에 답보상태에 있던 뮤직비디오의 가치를 재인식시켰다.
1987년에 발표된 [Bad]는 총 11곡중 5곡이 Billboard No.1에 올라 또 하나의 기네스 기록을 만들어 냈다. [MoonWalker]는 뮤지컬 형식으로 [Bad]를 기초로 하여 만든 영화이다.

1991년에 발표된 [Dangerous]는 퀸시 존스에게서 떨어져 나와 만든 첫 앨범으로서, 2850만장 이상의 판매량를 기록하였다.
녹음, 믹싱, 프로듀싱 등의 측면에서 매우 획기적이었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마이클은 [Dangerous] 앨범 발표 후 전세계적으로 고통받고 있는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Heal the World 재단"을 설립하여 많은 자선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또한 마이클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결혼,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996년에 발표된 [History]는 "past, present, and future"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자신의 과거, 현재에 이르는 역사를 정리하며 미래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기존 히트곡과 15곡의 신곡들로 구성된 더블앨범으로 96년에 발표되었다.
러닝타임 150분에 2장의 CD와 카세트, 3장의 LP, 그리고 그의 친구 및 팬들의 추천사, 축하문, 사진, 수상내역 등이 담긴 소책자까지 마이클에 대한 자료가 총망라되었다. 그는 "History Tour"에서야 고대하던 한국 공연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1996년 10월 11일, 13일 두 차례에 걸쳐 잠실 종합운동장에서 마이클 잭슨의 "History Tour in Seoul" 공연이 있었다. 11일은 평일인 관계로 만석이 되지 못했지만 13일 일요일 공연의 R석은 예매 시작후 2, 3일만에 동이 나버렸다.

마이클이 50대가 되면서 체력이 떨어져서 오랫동안 격렬하게 춤을 추는 일도 이젠 힘이 들고 숨이 찬다.
젊은 가수들이 폭풍을 일으키며 쫓아오려 한다. 그러나. 마이클은 감히 가까이 갈 수 없는 그야말로 King of Pop이다.
도대체 이 시대 이후로 어떤 사람이 또 그가 남긴 것과 같은 역사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아무도 감히 그런 사람이 나타나리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에 춤을 잘 추는 사람은 많다. 또 노래를 잘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그 두 가지를 겸비한 사람은 극히 드물며, 그는 대부분의 곡들을 직접 작곡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끼'이다. 관객들을 압도하고 카리스마로 누를 수 있는 엔터테이너의 '끼'를 갖춘 사람은 그야말로 마이클 잭슨 단 한 사람 뿐이었다. 사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춤과 노래이지만 그것은 그가 기타나 피아노를 못쳐서가 아니다. 그는 정말로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From Changgo.com & Sonymusic.co.kr]
못다한 이야기

검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발 뒤꿈치를 든 채 달빛 속 구름 가듯 걷는 마이클 잭슨의 문 워크(Moon walk)를 팬들은 잊지 못할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1억400만장이 판매된 ‘스릴러’(Thriller)와 그의 대표작 ‘빌리 진’(Billie Jean) 또한 젊은이들의 가슴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
배드’(Bad), ‘데인저러스’(Dangerous) 등 발표곡마다 히트를 친 그의 앨범들은 이미 팝의 명곡으로 평가받고 있다.

노래와 춤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마이클 잭슨이 세상을 떠났다.
팬들의 환호와 갈채, 비밀스러운 사생활까지 뒤로 한 채 2009. 6. 25. 5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은 한 팝 가수가 팬들의 곁을 떠났다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고 있다. 이 시대 젊은이들의 우상이었고, 새로운 문화코드를 만들어낸 팝의 황제였기 때문이다.

“스타는 인간과 신의 중간 영역에 있는 사람이며, 시궁창에 코를 박고 있는 스타란 없는 법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드가 모랭이 스타론을 펼치면서 한 말이다.
스타란 신화를 만들어내고 대중의 우상으로 떠오르는 인물이다. 신앙과 오락 사이를 오가며 미학적인 동시에 종교적이 된다는 것이다. 모랭의 이론은 마치 마이클 잭슨을 염두에 둔 것처럼 그대로 들어맞았다.

무엇보다 마이클 잭슨이 남긴 대중문화적 성과는 팝의 역사에 기록될 만하다.
그는 팝 음악에서 춤의 영역을 확장시켰고, 뮤직비디오를 통해 ‘보는 음악’이 갖는 영상적 매력을 한껏 높여 놓았다. 공동묘지에서 튀어나온 시신들과 함께 펼치는 ‘스릴러’에서의 몸 동작은 뮤직비디오사상 충격적인 명장면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 영광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흑인으로 태어나 백인사회에서 겪었던 정체성의 혼란, 이혼과 파산, 성추문 등 누구보다 험한 인생의 뒷면을 갖고 살았던 사람이었다.

생의 영(榮)과 욕(辱)을 같은 무게로 짊어지고 살았던 마이클 잭슨. 그는 떠났어도 대중들의 마음속에서 영원한 우상으로 남을 것이다.
마릴린 먼로가 아직도 섹시스타의 상징으로 남아 있고, 엘비스 프레슬리 묘소에 매년 수십만명의 참배객이 몰리는 것도 이 때문 아니겠는가.
팬들은 인간 마이클 잭슨을 잃었지만, 이 시대 우상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글 : 경향신문 박성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