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1770 - 1827, 독일)

1770년 12월 17일, 본에서 출생했으리라고 추정될 뿐 정확한 출생일은 알 수 없다. 시기적으로 이해는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있던 때였다.
본은 라인강 상류 서안의 문화·정치·종교·군사상의 중요 도시였고, 그의 생가(生家)는 오늘날 베토벤 박물관으로서 보존되어 있다.

아버지 요한은 궁정의 테너 가수였고, 자녀는 7명이 있었다.
그러나 차남(次男)인 루트비히와 셋째, 넷째 형제만 남고 모두 일찍 죽었다. 후에 두 동생과 아버지는 베토벤에게 신세를지는 처지가 된다.

  본 시대의 사람들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들로부터 피아노를 중심으로 음악교육을 받았다. 아버지는 아들을 모차르트와 같은 천재음악가로 인정받게 하기 위해 루트비히의 나이를 속여 사람들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천성적인 노력형 음악가일 뿐 신동적인 천재성은 갖고 있지 않았다.

베토벤의 작곡 재능을 인정하여 본격적으로 지도를 한 사람은 궁정 오르가니스트인 네페였다. 그는 면학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이 젊은 제자를 극진히 뒷받침했다.
그리고 부로가 13세인 베토벤에게 부(副)궁정 오르가니스트의 지위를 주어 제2의 모차르트로서 세상에 소개했다.

베토벤이 피아노 가정교사를 하던 브로이닝가(家)의 사람들도 본 시대의 베토벤에게 있어서는 잊을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정규학력이라고는 초등학교 중퇴가 전부인 베토벤에게 있어서 브로이닝 가(家)는 교양과 사교를 배우는 교육의 장이 되었으며, 그 집의 장녀 에레 오놀과는 애틋한 사랑도 싹텄다.
이곳에서 알게 된 귀족들 가운데는 발트시타인 백작이 있었다. 그는 후에 이 젊은 음악가에게 물심 양면의 원조를 아끼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베토벤은 본 대학에 청강생으로도 나갔다. 그때 알게 된, 본 대학의 피셰르니히 교수도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시나이더 교수의 정열적인 강의는 청년 베토벤에게 자유사상을 고취시켰다.

  빈의 젊은 마이스터

당시 빈은 유럽 음악의 중심지였다. 모차르트는 이미 죽은 뒤였으나 하이든은 건재했고 귀족들은 여전히 음악을 좋아했다. 그리고 비록 정치적 상황은 불안했지만 그들에게는 아직도 재력의 여유는 있었다.

본의 생활에 만족할 수 없었던 베토벤은 하이든에게 정식 입문하기로 결심했다. 다행히도 발트시타인 백작의 도움으로 관비유학의 길이 열렸다.
또한, 백작의 소개로 리히노브스키 후작의 살롱을 비롯한 빈의 사교계에 드나들 수 있는 편의도 부여받았다.
그러나 그곳은 아직도 보수적인 풍토라서 풋내기 청년음악가가 인정을 받기에는 힘든 곳이었다. 어렵게 만나게 된 스승 하이든도 바쁜 생활 때문에 새 제자를 돌볼 틈이 거의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우선 자신 있는 부분인 피아노로 빈 음악계에 데뷔했다. 물론 작곡 쪽도 피아노 음악에 중점을 두었다.

21세인 1795년, 최초의 공개 연주회에서 자작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연주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젊은 마이스터로서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창작기는 3기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해부터 [교향곡 1번],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이 완성되는 1800년까지가 그이 창작기 중의 제1기이다.
이 시기에 [7중주곡 Op.20], 6곡으로 된 [현악4중주곡 Op.18], 피아노 소나타 [비창] 등의 주요작품이 써졌다.
이 작품들은 모두 전통적인 경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지만 독창성이 뛰어나 그가 위대한 음악가가 될 조짐을 보여 주고 있다.

  불멸의 애인과 하일리겐시타트의 유서

베토벤은 키가 작고 피부 빛도 검어서 귀족사회의 우아함과는 인연이 먼 사나이였지만 인품만은 어딘가 매력적인 데가 있었다.
28세인 1799년, 브룬스비크 가의 테레제와 기치아르디 가의 줄리에타가 그에게 입문하게 되는데, 베토벤은 이 두사람과 유명한 연애를 한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그의 귀는 이미 이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줄리에타에게는 피아노 소나타 [월광(1801년)]이 바쳐졌고, 테레제와는 36세에 약혼을 한 상태였다.
불행히도 이 약혼은 깨지지만 두 사람의 애정은 그 뒤에도 계속되어 모두 독신으로 평생을 지냈다.
베토벤이 사랑했던 여인들은 모두 그와는 신분이 다른 귀족이나 부호의 딸이었다.

1802년 여름, 의사의 권고로 하일리겐시타트의 시골로 옮겨온 베토벤은 귓병의 불치를 확인한다.
그러나 창작에의 의욕은 이 인생의 절망을 극복하고, 바이올린 소나타 [크로이체르(1803년)]를 실마리로, 빛나는 제2의 창작기로 들어간다.

  명작의 시대

33세인 1804년에 필생의 역작인 교향곡 제3번 [영웅]을 완성했다. 착상은 하일리겐시타트에서 얻었으며, 처음에는 나폴레옹 1세에게 바칠 예정이었으나 그의 황제 취임에 마음이 틀어져서 이것을 파기했다.

이후 1806년의 [바이올린 협주곡], 현악4중주곡 [라주모브스키], 1807년의 [교향곡 제4번], [피아노 협주곡 제4번], 서곡 [코리올란], 피아노 소나타 [열정], 다음 해에 교향곡 제5번 [운명], 제6번 [전원] 등의 불명의 명작이 잇따라 나왔다.
그리고 38세인 1809년의 피아노 협주곡 제5번 [합창]에서부터 제2기 명작시대가 정점에 도달한다.
이해에 나폴레옹 군은 빈을 점령했다. 다음 해에는 테레제와의 약혼이 파기되어 물심 양면으로 그의 생활에 새로운 위기가 닥치기 시작하고 그토록 왕성했던 창작활동도 침체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다정한 사이였던 루돌프 대공에게 바쳐진 피아노3중주곡 [대공]과 대공이 한동안 빈을 떠날 때 쓰인 피아노 소나타 [고별]에는 고독하고 내성적인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이윽고 찾아올 제3기의 작풍(作風)을 예고한다.

  전쟁교향곡

[교향곡 제7번]의 초연은 보기 드물게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것은 동시에 상연된 ‘전쟁교향곡’이라고도 불리는 묘사음악 [웰링톤의 승리]가 나폴레옹의 승리에 들뜬 빈 시민에게 열광적으로 환영받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교향곡 제8번]의 초연과 같은 이유로 성공했다. 이때 [전쟁교향굑]은 이미 4회째 상연이었다.

그의 세속적 명성은 이렇게 고조되었으나 그 창작활동은 절망적인 침체에 빠져들고 있었다. 귀가 이미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연주활동은 더 이상 불가능해졌고 일상적인 대화에서 조차 메모가 필요했다.

게다가 그의 어리석은 조카 칼은 그를 배신하였고 후원자였던 유족들도 몰락하거나 이주를 하여 물질적으로도 몹시 궁핍해졌다.
유일한 후원자였던 루돌프 대공은 오르뮈츠의 대사교로 취임해 있었다.
그는 대공의 대사교 취임식을 위해 [장엄미사]를 구상했다. 이것은 그의 생애에 닥친 제2의 위기를 극복하고 절망의 골짜기에서 벗어나는 실마리가 되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가리라

그는 [장엄미사]의 완성에 전력을 다했다. 곡을 써나감에 따라 부풀려져서 끝내 취임식 전까지 완성되지 못했으나, 그는 총보(모음악보) 첫 머리에 ‘마음에서 - 다시 마음으로 가리라’라고 적어서 대공에게 바쳤다.

[장엄미사]의 완성을 위해 그는 많은 빚을 지고 있었는데, 때마침 런던의 필하모니협회로부터 교향곡의 의뢰가 왔다.
그는 오래 전부터 실러의 장편시 [황희에 붙임]을 음악으로 만들기를 희망하고 새로운 교향곡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 희망과 구상이 결합할 기회가 온 것이다. 마지막 대작인 교향곡 제9번 [합창]은 이렇게 해서 실현되었다.

  고고한 만년

대작을 완성한 베토벤이었지만 그는 지칠 줄 모르고 여전히 대작에 대한 의욕을 버리지 않았다. 그때 러시아에서 돌아온 옛 친구인 바이올리니스트 시판치히의 4중주단 결성은 그를 크게 자극했다.
때마침 러시아의 가리친 후작으로부터의 부탁도 있어서 그의 창작은 마지막 5곡의 현악 4중주곡 완성에 집중하였다.
이 곡들은 후에 신품(神品)이라고 일컬어질 정도의 대작이었다. 이미 13년간이나 4중주곡을 쓰지 않았으나 만년의 고독한 체험을 토로하는 데는 이 간소한 형식이 가장 알맞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Op.127에서Op.135에 이르는 5곡의 현악4중주곡의 공통점은 모두 자유로운 구성과 순진한 유희성을 지니고 있었다. 작곡가 베토벤의 창작은 이미 이것으로 끝나고 있었다.

1826년 12월,그나이센도르프에 사는 동생 요한의 집에서 돌아온 베토벤은 복부의 통증과 폐렴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청년시절부터의 지병인 장질환이 치유 불능의 상태로 악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4차례나 수술을 받았으나 모두 효과가 없었다.

마침내 다음 해인 1827년 3월 26일, 베토벤은 56년의 생애를 마쳤다.
쇼트 출판사로부터 마인츠 산(産) 포도주가 도착했을 때 "유감인 걸, 너무 늦었어!"하고 중얼거린 것이 마지막 말이었다고 한다.

  공전절후의 대음악가

베토벤이 음악 사상에 남긴 공적은 무엇보다도 종교적 분야에서 컸다. 종교적 전례(典禮)의 반주나 사교 수단이었던 그때까지의 음악은 그에 의해서 인간정신의 최고의 표현으로 끌어올려진 것이다.

특히 교향곡, 현악4중주곡이나 독주악기를 위한 소나타 등 기악곡 영역에서의 작품은 인류의 영원한 보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토벤 이후의 음악가로서 기법이나 규모면에서 그를 능가하는 작품을 쓴 사람으로는 바그너나 브람스도 있다.
또 드뷔시나 라벨처럼 베토벤과는 성격이 다른 아름다운 음향을 찾아내어 완벽하게 연마한 음악가도 적지 않다.
그러나 타오르는 정의감에 뿌리박은 엄격한 도덕성을 베토벤만큼 음악에 일관시킨 예술가는 그 어느 시대에도 발견하기가 어렵다.
그가 존경한 J.S 바흐나 모차르트조차도 이 점에서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