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뷔시

Claude Achille Debussy

(1862 - 1018, 프랑스)

파리 근교 생 제르망 레이에서 태어났다.
같은 해에 태어난 음악가로는 영국의 '델리어스'가 있고 문호 '메테르링크'도 이 해에 태어났으며, 파리에서는 ☞ 인상주의 운동이 개시되려는시기였다.

도자기상을 하는집의 맏이로서 4명의 동생을 두고 있었다. 생활이 넉넉치 못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자주 직업을 바꾸고 이사를 다녔다. 두 여동생은 칸느에 있는 백모 집에 맡겨져 있었는데 어린 '클로드'는 피아노의 기초를 그 백모에게서 익혔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시인 '베를레르'의 장모인 '모테 부인'에게 그의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아 음악가의 생애를 살게 되었다.

뛰어난 피아니스트인 '모테 부인'은 무상으로 레슨을 맡아 주어 '클로드'는 파리 음악원에 압학할 수 있었다. 이윽고 '클로드'의 관심은 피아노에서 작곡으로 옮겨졌다.

  로마 대상

당시 작곡가의 등용문으로서 로마상 제도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대상을 획득한 사람에게는 로마 유학이 허용되었다.
'드뷔시'는 22세인 1884년에 칸타타 『탕아』로 두 번째 도전하여 상을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로마에서의 생활은 '드뷔시'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다.
그는 의무기간인 2년을 마치고는 즉시 귀국, 유학 작품의 하나인 『봄』을 완성하여 학사원에 제출했으나 파격적인 작풍(作風) 때문에 수리되지 못했다.

당시 그는 많은 청년음악가와 마찬가지로 '바그너'의 예술에 열중하고 있었다.
1888년과 다음 해의 두 차례에 걸쳐 바이로이트를 여행한 드뷔시는 이윽고 이 혁명적인 예술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고, 반(反) '바그너' 파로 기울면서 자기의 재능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반면에 1889년의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접한 극동의 음악은 그를 크게 매혹하여 작품에 적잖은 영향을 주게 된다.

  『목신의 오후』 전주곡

'드뷔시'의 가곡에는 ‘베를레르’의 시(詩)에 의한 것이 많다.
‘베를레르’에 대한 이러한 심취가 이윽고 상징파 문인들과 접근할 기회를 낳고 다시 말라르메의 ‘화요일 밤의 모임’에 출석하게 된다. 말라르메의 『목신의 오후』를 음악화하려는 착상은 여기에서 생겨났으며 32세인 1894년에 완성, 초연은 대호평을 받았다.

이 불후의 명작은 '드뷔시'가 오랫동안 탐구해 온 독자적인 어법의 훌륭한 결정(結晶)이었고 이미 구상에 착수하고 있던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의 완성에 대한 자신감을 주었다.

  『펠레아스』

다음 해인 1895년에 『펠레아스』가 구상되었으나, 완성하여 상연되기까지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에 『빌리티스의 노래』, 3곡의 「야상곡」이 잇따라 완성되어 독자적인 악풍은 더욱 다듬어졌다.

주로 피아노 교수의 수입에 의존하던 당시의 생활은 매우 궁핍했으나 36세 되던 봄, 오페라 코미크좌로부터 『펠레아스』 사연을 약속하는 낭보가 날라들어 『펠레아스』는 마지막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다.
다음 해에는 ‘릴리 텍시’와 결혼하여, 가난하지만 충실한 생활을 한다. 그로부터 3년 후, 이런저런 물의를 빚은 끝에 『펠레아스』가 완성되어 초연되었다.
완전히 반(反) '바그너'적인 이 오페라의 상연은 찬부 양론을 크게 불러일으켜 ‘위고’의 『에르나니』 초연을 연상케 했는데, 상연을 거듭할 때마다 그 성공이 확고해졌다.

   『바다』에서의 탈피

그러나 그는 『펠레야스』의 성공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드뷔시'가 의도하는 것은 도리어 『펠레야스』로부터의 탈피였다. 이미 『판화』에서 새로운 경향을 제시하고 있어으나 1905년에 완성한 교향시 『바다』는 그것을 단호하게 구현한 음악이었다.
그 때까지의 그의 음악을 특징짓고 있던 몽환적인 분위기는 이미 여기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해조음이 들려오는 듯한 멋진 음획은 인상파 화가가 추구한 색과 빛의 현실성을 소리에 의해 추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해의 『영상(映像)』 제1집, 1907년의 제2집, 다음 해의 『어린이 세계』, 그리고 『이베리아』나 『전주곡』 제1집도 마찬가지이다. ☞ 인상주의 음악은 이 10년간에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

그러나 그의 개인 생활은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유부녀 ‘엠마’와의 연애는 마침내 ‘릴리’와의 사이를 파국으로 이끈 것이다.
이 사건으로 친구들도 그를 떠났고 '드뷔시'의 마음에는 고독의 그림자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엠마’와의 사이에서 생긴 딸을 위한 『어린이 세계』에서조차 그런 그의 심경을 엿볼 수가 있다.

이러한 고독 속에서 마침내 자유로운 작품을 전개해 나갔다.
신비극(神秘劇) 『성 세바스티앙의 순교』가 그 제1작이었다.
그러나 발레 『유희』의 초연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해에 젊은 친구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 큰 소동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이미 새로운 음악이 힘차게 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가인 '드뷔시'의 명성은 이제 확고부동한 것이었으나 그의 육체는 이미 그 무렵에는 암(癌)에 의해 침식당하고 있었다. 또한 세계대전의 발발은 그 애국심을 괴롭혔다.

53세에 수술을 받아 체력이 쇠약해진 그는 최후의 기력을 다해 프랑스의 전통에 의한 6곡의 소나타를 쓰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제3곡째인 「바이올린 소나타」를 쓰고 났을 때는 이미 기력이 쇠진해질 대로 쇠진해 있었다.
1918년, 병세는 극도로 악화되어 3월 25일 오후, 독일군의 포성이 멀리 울리는 가운데 파리의 자택에서 조용히 56세의 생애를 마쳤다.

   음악 표현의 본질적 변혁

이른바 인상주의 음악의 개조인 '드뷔시'는 '바그너'로 대표되는 원숙한 후기 낭만파 음악에 대한 가장 용감한 도전자였다.
그의 음악이 근대 음악사상에서 이룩한 획기적인 역할은 인상주의 회화만큼 큰 것으로서 서양 음악의 표현능력을 밑바닥부터 변화시킨 것이었다.

특히 동양적인 음감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의 영향을 받은 음악가는 수없이 많지만 직접적인 정신적 후계자는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한 세계사의 큰 변모가 '드뷔시'를 고립시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