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ude Achille Debussy (1862 - 1018, 프랑스)
파리 근교 생 제르망 레이에서 태어났다.
도자기상을 하는집의 맏이로서 4명의 동생을 두고 있었다. 생활이 넉넉치 못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자주 직업을 바꾸고 이사를 다녔다. 두 여동생은 칸느에 있는 백모 집에 맡겨져 있었는데 어린 '클로드'는 피아노의 기초를 그 백모에게서 익혔다.
뛰어난 피아니스트인 '모테 부인'은 무상으로 레슨을 맡아 주어 '클로드'는 파리 음악원에 압학할 수 있었다. 이윽고 '클로드'의 관심은 피아노에서 작곡으로 옮겨졌다.
로마 대상
당시 작곡가의 등용문으로서 로마상 제도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대상을 획득한 사람에게는 로마 유학이 허용되었다.
당시 그는 많은 청년음악가와 마찬가지로 '바그너'의 예술에 열중하고 있었다.
『목신의 오후』 전주곡
'드뷔시'의 가곡에는 ‘베를레르’의 시(詩)에 의한 것이 많다.
이 불후의 명작은 '드뷔시'가 오랫동안 탐구해 온 독자적인 어법의 훌륭한 결정(結晶)이었고 이미 구상에 착수하고 있던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의 완성에 대한 자신감을 주었다.
『펠레아스』
다음 해인 1895년에 『펠레아스』가 구상되었으나, 완성하여 상연되기까지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에 『빌리티스의 노래』, 3곡의 「야상곡」이 잇따라 완성되어 독자적인 악풍은 더욱 다듬어졌다.
주로 피아노 교수의 수입에 의존하던 당시의 생활은 매우 궁핍했으나 36세 되던 봄, 오페라 코미크좌로부터 『펠레아스』 사연을 약속하는 낭보가 날라들어 『펠레아스』는 마지막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다.
『바다』에서의 탈피
그러나 그는 『펠레야스』의 성공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해조음이 들려오는 듯한 멋진 음획은 인상파 화가가 추구한 색과 빛의 현실성을 소리에 의해 추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개인 생활은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었다.
이러한 고독 속에서 마침내 자유로운 작품을 전개해 나갔다.
대가인 '드뷔시'의 명성은 이제 확고부동한 것이었으나 그의 육체는 이미 그 무렵에는 암(癌)에 의해 침식당하고 있었다. 또한 세계대전의 발발은 그 애국심을 괴롭혔다.
53세에 수술을 받아 체력이 쇠약해진 그는 최후의 기력을 다해 프랑스의 전통에 의한 6곡의 소나타를 쓰기로 결심했다.
음악 표현의 본질적 변혁
이른바 인상주의 음악의 개조인 '드뷔시'는 '바그너'로 대표되는 원숙한 후기 낭만파 음악에 대한 가장 용감한 도전자였다.
특히 동양적인 음감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