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역사적 흐름

바로크 시대의 음악(17~18세기 전반)

'바로크 음악'이라고 하면 대체로 16세기 말부터 1750년경까지의 음악을 말한다. 16세기 말은 조반니 가브리엘리를 중심으로 하는 베네치아 악파의 시대이며, 1750년은 바흐가 죽은 해이기도 하다.
따라서 바로크 음악, 특히 대위법의 음악은 바흐의 작고와 함께 대체로 끝나게 되었다.

바로크의 본래 뜻은 '균형이 잡히지 않는 진주'란 뜻으로서, 르네상스의 명쾌한 균형미로부터 벗어나 번잡하고 까다로운 세부 기구의 과잉된 표현을 말하는 것이다.
나라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공통된 특성은, '전형미에 사로잡히지 않고 형식과 균형을 깨뜨려 강력한 표현을 중요시하는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범위를 좀더 한정짓는다면 바로크 음악은 '근대의 화성적인 원칙과 중세의 대위법적 방법이 결합된 17세기의 새로운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초엽의 르네상스 정신에 자극되어 새양식인 화성적인 반주를 지닌 이른바 ☞ 단음악(monophony)을 기용하여 또 하나의 새로운 시대를 기획한 것이 바로크 양식인 것이다.
음악상으로는 르네상스의 작품에서부터 로코코(Rococo) 양식으로 옮겨 가는 중간 단계이다.

바로크 음악의 사회적인 기초는 절대주의 왕권과 귀족 제도이며, 주로 극음악과 기악 음악의 형태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바로크 음악의 주축이 된 베니스 나폴리파의 교회 음악과 오페라 기악 부문은 모두 유럽 전역에 그 힘이 미치게 되었다.

베시스의 성 마르코 교회에서는 59성부의 미사가 연주되었으며, 오페라와 오케스트라 내지 심포니의 기원도 이탈리아의 바로크 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바로크 음악의 거장 몬테베르디가 1612년에 베네치아로 이주한 것은 오페라에 의한 본격적인 바로크 시대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페라의 탄생

오페라(Opera)는 바로크 시대인 16세기 말에 생겼다. 16세기 말경 이탈리아 피렌체의 음악 애호가 바르디의 집에 신진 음악가와 시인들이 모여 새로운 음악을 연구했는데, 이 집단을 '카메라타(camerata)'라고 불렀다.
그들은 르네상스의 정신에 따라 음악도 고대 그리스의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대위법을 버리고 단순한 선율에, 간소한 화성의 반주를 붙이는 양식을 고안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 단음악(monophony)이며, 여기에서 바로크 음악이 시작된다.
이것을 만든 것은 카메라타 집단이지만, 그것을 최초의 가곡으로 쓴 사람은 갈릴레이와 카치니였다.

1597년 시인 리누치니의 대본에 페리가 오페라 [다프네]를 작곡하였다. 이것이 상연된 이래 카메라타의 역사는 오페라의 역사를 출발시키게 된다. 1600년에는 리툿치니의 시에 페리와 가치니가 작곡한 [에우리디체]를 상연했는데, 이 작품을 기점으로 오페라의 확립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오페라 사상 결정적인 것은 1607년, 몬테베르디의 오페라 [오르페오]를 상연한 때부터이다. 그는 기악의 서주(序奏)로 오페라를 시작했으며, 춤곡과 심포니아라고 하는 기악곡을 사용했다. 이 영향을 받아 스카를라티를 주축으로 하는 '나폴리 악파'가 생겼으며, 프랑스는 륄리를 중심으로 '프랑스 오페라'가 생겼고 영국과 독일에서도 오페라 운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오라토리오와 칸타타

바로크 시대인 1600년대 ☞ 오라토리오(oratorio : 聖譚曲)가 로마에 등장하였다. '오라토리오'란 성서에 의한 소재에 몇 사람의 독창과 합창, 관현악으로 연주하는 큰 규모의 가곡을 말한다.
곡은 극적인 구성과 무대 장치가 없이 연주되므로, 교회 칸타타와 수난곡(passion music)과의 한계가 애매함을 볼 수 있다.

오라토리오는 중세 이후 카톨릭 교회에서 상연했던 전례극(典禮劇)이나 신비극(mystery) 등에서 생긴 이래로 바로크 시대에 이르러서는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뛰어난 작곡가로는 17세기 이탈리아의 카리시미,17세기 독일의 쉬츠, 그리고 18세기 헨델, 하이든 등을 들 수 있다

칸타타(cantata)는 17세기 초에 ☞ 단음악(monophony)의 또 하나의 형식으로 생겨났다. 이는 본래 성악곡을 말하는 것으로서17세기에는 기악 반주가 있는 대규모의 성악곡으로 발전하였다.
내용상으로 분류하면, 세속적인 실내 칸타타(cantata da camera) 혹은 세속 칸타타와 종교적인 내용, 또는 전례용으로 된 교회 칸타타(cantata da chiesa)가 있다.

악기의 발달

이전까지 합창 만능에서 벗어나 바로크 시대에 오면 독창 또는 독주적인 음악이 등장한 대표적인 건반 악기로서 먼저 줄을 쳐서 소리를 내는 클라비코드(Klavichord)가 등장하는데,
이는 셈 여림이 가능한 것으로서, 피아노의 전신이다.


그리고 줄을 튀겨서 소리를 내는 하프시코드(harpsichord)도 함께 기능을 발휘하는데, 이것은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쳄발로(cembalo), 프랑스에서는 클라브생(clavecin)이라 부르며, 이 시기에 사용된 악기였다.

이탈리아의 경우는 기악이 성악에서 독립된 시기였다.
지금까지의 악기는 성악의 편곡을 연주하거나 또는 중창과 합창에 있어서 목소리의 보조적인 역할을 하던 거시 이 시대에 이르러 마침내 기악의 독립화를 이룩하게 된 것이다.

바이올린을 만드는 불세출의 제작가들이 이 시기에 출현한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바이올린의 완성은 크레모나파(he cremona school)의 위대한 제작자에 의해서 성취되었다. 크레ㅗ나는 알프스 산맥의 남쪽 포 강에 위치한 고장으로서, 세계 최고의 바이왼 제작가가 나온 곳으로 유명하다.

여기 아마티(Amati) 가문과 구아르네리(Andrea Guarneri) 가문에서 훌륭한 명기(名器)를 제작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아마티의 제자 스트라디바리의 제품은 3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 성능이 대단하여 아주 귀한 명기로 인정받고 있다.

기악곡

이 시기에는 또 콘체르토(concerto : 協奏曲)라는 용어도 생겼다. 이 말이 16세기 전반 이탈리아에서 음악 용어로 사용되던 때는 '성악과 기악의 앙상블'로서 '중창' 또는 '중주'라는 뜻으로 통하였다.

그러나 17세기 후반부터는 '반주가 있는 독주(獨奏)를 의미하는 '합주 협주곡(合奏協奏曲 : concerto grosso)'이 생겼다. 이것은 관현악이 2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져 연주하는 것으로서, 극소수의 인원으로 된 독주부인 콘테르티노(concertino)와 관현악의 집단으로 구분한다.
이 두 그룹이 대화풍으로 서로 응답하면서 연주해 나가는 형식의 음악인 것이다.

소나타(sonata)는 17세기 말경에 생겨, 기악 독주, 2중주, 3중주 형태로 연주되었다. 처음에 이탈리아의 작곡가들은 푸가 양식의 교회 소나타(sonata da chiesa)와 실내 소나타로 구분하였으나, 17세기에는 이 양식이 하나로 합쳐졌다.

협주곡이나 소나타는 2악장, 또는 3악장으로 구분되어 발전하였고, 앞서 말한 합주 협주곡은 고전파 시대에 협주곡으로 변화하였다.

모음곡(suite : 組曲)은 몇 개의 곡을 묶어 모든 기악곡이. 이것도 역시 17세기이 산무로서, 몇 개의 악곡을 같이 모으는 형식은 소나타나 교향곡과 같지만, 모음곡은 소나타와 교향곡처럼 상호간의 내면적인 연결이 없고 단지 성격이 다른 곡을 대조시킨 것이다.

관현악(orchestra)곡으로는 신포니아(sinfonia)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오페라이 발달과 함께 생겨났다. 처음에는 끝부분의 반주 역할을 하는 저오였으나 바로크 말기에 고전파 시대에 이르러 크게 발전하여 교향곡 시대를 이루었다.

오르간곡으로 17세기에 주목할 만한 것은 ☞ 푸가(fuga)이다. 이 형식이 점차 완성되어 바흐 시대에 이르러서는 최고조에 달하였다.
그런데 바로크 음악에 있어서 독일은 같은 시대의 이탈리아나 프랑스에 비하면 별로 특색이 없었다. 오페라나 기악도 거의 육성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바로크 말기에 바흐와 헨델이 등장하면서 독일의 바로크 음악은 비로소 결정적인 결실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대위법적인 음악의 깊이까지 그 진가를 완성함과 동시에 이탈리아의 바로크와의 융합을 이룬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거장은 창작면에서는 크게 다른 점이 많았다.
작품면에서 볼 때, 헨델은 ☞ 오라토리오와 오페라에 중점을 두었어며, 기악적인 작품에 있어서도 성악적인 요소가 강했다. 반면에 바흐는 성악작품에 이르기까지 기악적인 요소가 많이 포함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