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 작품의 세계
1985년 2월 23일, 할레에서 태어났다. J.S. 바흐도 같은 해에 태어났다. 헨델은 어렸을 때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나 아버지는 그를 법률가로 키우고 싶어 했다. 아버지는 헨델이 11세 때 세상을 떠났으나 그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할레 대학에 입학, 법률을 공부하였다. 한편 교회 오르가니스트(Organist)의 견습으로 근무하면서 음악공부도 게을리하지 하지 않았다.
함부르크에서 하노바로..
18세(1703년)에 함부르크 오페라 극장의 바이올리니스트(Violinist)로 취직하면서 헨델은 할레를 떠난다.
여행도중인 25세에 하노바 선제후의 궁정악장 스테파니의 추천으로 헨델은 스테파니 후임 궁정악장이 되었다.
근대국가 영국으로
여행길에 잠시 고향 할레에 들른 후 헨델은 뒤셀도르프,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으로 향했다. 당시 런던에서는 이탈리아 오페라가 많이 상연되고 있었다. 헨델은 첫 작품 [리날도]를 영국 도착 후 불과 2주일 만에 완성하여 상연했는데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26세(1711년), 헨델은 긴 여행을 마치고 하노바로 돌아 왔지만, 다음 해에 일정 기간 안에 돌아오겠다는 조건으로 선제후의 허가를 얻어 또다시 런던으로 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왕성한 활동기를 맞는다.
왕립 음악 아카데미
헨델은 런던 왕실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특히 앤 여왕에게 인정을 받아 왕실 악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인기가 쇠퇴했던 오페라를 부흥시키고자 귀족들은 새로운 왕으로 하여금 투기적인 흥행회사인 ‘왕립 음악 아카데미’를 설립토록 했다.
맞수 보논치니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가 지오반니 보논치니가 35세(1720년)의 가을에 초대되어 [아스트라트를 상연하였다.
그 후 ‘아카데미’는 자체의 경영이 어려워진데다 이탈리아에서 초청해 온 두
☞ 프리마돈나의 싸움에 얽혀서 청중은 마침내 머리를 돌리고, 1728년에는 끝내 해산하게 되었다.
헨델은 이에 크게 상심하였으나 곧 흥행사의 하이데거와 손잡고 독자적인 극장 경영에 나서 신작 [로타리오]를 비롯하여 왕성한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메시아]의 대성공
헨델의 절망적인 병은 온천요법에 의해 기적적으로 회복되었지만 사업의 실패로 인한 많은 부채 때문에 채권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56세(1741년), 헨델은 24일 만에 [메시아]를 완성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