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 작품의 세계

헨델

Goerg Friedrich Handel

(1985 - 1759, 독일)

1985년 2월 23일, 할레에서 태어났다. J.S. 바흐도 같은 해에 태어났다. 헨델은 어렸을 때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나 아버지는 그를 법률가로 키우고 싶어 했다. 아버지는 헨델이 11세 때 세상을 떠났으나 그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할레 대학에 입학, 법률을 공부하였다. 한편 교회 오르가니스트(Organist)의 견습으로 근무하면서 음악공부도 게을리하지 하지 않았다.

함부르크에서 하노바로..

18세(1703년)에 함부르크 오페라 극장의 바이올리니스트(Violinist)로 취직하면서 헨델은 할레를 떠난다.
20세(1705년)에 그는 최초의 오페라 [알미라]의 상연에 성공하여 음악가로서 자신감을 얻게 된다.
21세에는 이탈리아로 연주여행을 떠나 건반악기의 연주가·작곡가로서 인정을 받는다. 이 여행에서 그는 이탈리아 음악을 마음껏 접했고 특히 스카를라티 부자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여행도중인 25세에 하노바 선제후의 궁정악장 스테파니의 추천으로 헨델은 스테파니 후임 궁정악장이 되었다.
하노바의 궁정은 프랑스풍의 뛰어난 관현악단과, 당시 유럽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그장을 기지고 있었으나 헨델은 여기에서도 정주하지 못하고 또다시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근대국가 영국으로

여행길에 잠시 고향 할레에 들른 후 헨델은 뒤셀도르프,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으로 향했다. 당시 런던에서는 이탈리아 오페라가 많이 상연되고 있었다. 헨델은 첫 작품 [리날도]를 영국 도착 후 불과 2주일 만에 완성하여 상연했는데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을 계기로 헨델은 귀족사회에 출입하게 되었고 동시에 건반악기 즉흥연주가로서의 지위도 확보했다.

26세(1711년), 헨델은 긴 여행을 마치고 하노바로 돌아 왔지만, 다음 해에 일정 기간 안에 돌아오겠다는 조건으로 선제후의 허가를 얻어 또다시 런던으로 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왕성한 활동기를 맞는다.

왕립 음악 아카데미

헨델은 런던 왕실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특히 앤 여왕에게 인정을 받아 왕실 악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714년에 여왕이 갑자기 죽었다. 그리고 조지 1세를 선언하며 새로 왕위에 오른 것은 다름 아닌 하노바 ☞ 선제후(選帝侯)였다.
돌아가겠다는 약속이 너무 늦어져서 헨델과 왕 사이는 한때 서먹서먹한 관계였으나, 곧 해소되고 헨델은 왕실악장의 지위를 확보하고 계속적으로 활약을 하게 된다.

당시 인기가 쇠퇴했던 오페라를 부흥시키고자 귀족들은 새로운 왕으로 하여금 투기적인 흥행회사인 ‘왕립 음악 아카데미’를 설립토록 했다.
헨델은 그 예술부문을 담당하였고, 그 후로는 이 곳을 활동 거점으로 삼게 되었다.

맞수 보논치니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가 지오반니 보논치니가 35세(1720년)의 가을에 초대되어 [아스트라트를 상연하였다.
[아스트라트]는 30회 이상을 상연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자 헨델과 보논치니는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경쟁자의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아카데미’의 귀족들도 이들 두 진영으로 나뉘어졌으며 마침내는 정치적 대립으로 발전, 큰 파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1723년에 상연된 헨델의 신작 [오토네]가 성공을 거두자 보논치니의 인기는 차츰 떨어졌다. 또한 보논치니가 남의 작품을 도용한 사실도 드러나 그의 인기는 추락하고 말았다.

그 후 ‘아카데미’는 자체의 경영이 어려워진데다 이탈리아에서 초청해 온 두 ☞ 프리마돈나의 싸움에 얽혀서 청중은 마침내 머리를 돌리고, 1728년에는 끝내 해산하게 되었다.

헨델은 이에 크게 상심하였으나 곧 흥행사의 하이데거와 손잡고 독자적인 극장 경영에 나서 신작 [로타리오]를 비롯하여 왕성한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런던의 청중은 이미 이탈리아 오페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있었다.
헨델은 51세에 ☞ 오라토리오 [알렉산더의 향연]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중풍에 걸려 반신불수의 몸이 되고 말았다.

[메시아]의 대성공

헨델의 절망적인 병은 온천요법에 의해 기적적으로 회복되었지만 사업의 실패로 인한 많은 부채 때문에 채권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이러한 헨델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자선 음악회를 열어 가까스로 부채를 청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병에서 회복된 후 헨델의 관심은 오페라를 떠나 오라토리오로 향하고 있었다.

56세(1741년), 헨델은 24일 만에 [메시아]를 완성하였다.
[메시아]의 더블린에서의 초연은 헨델에게 생애 최대의 성공을 안겨 주었다.
런던의 청중은 처음에는 이 작품에 냉담하였으나 1750년 말에 이르러 런던에서도 완전히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 무렵부터 헨델은 마침내 건강이 극도로 나빠졌다.
특히 시력은 거의 절망적으로 쇠약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연주활동을 필사적으로 전개하여 74세(1759넌) 4월, 코벤트 가든 극장에서 [메시아] 연주에 입회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8일 후인 14일, 헨델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