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 작품의 세계

하이든

Franz Joseph Haydn

(1732 - 1809, 오스트리아)

3월 31일, 오스트리아의 로라우에서 태었다. 같은 해에 출생한 사람으로는 프랑스의 작가 보마르셰가 있다. 이 무렵 정치적으로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가 절대주의를 확립하고 있었다.

하이든의 아버지는 전문적으로 수레를 만드는 목수로서 음악을 매우 좋아했다. 요제프는 12형제의 장남이었는데, 6세 때부터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아 숙부 프랑크에게 맡겨져 교육을 받게 되었다.

빈에서의 방랑생활

8세(1740년)에 프란츠는 빈의 사테판 교회 합창대에 채용되었다. 그러나 17세 때인 1749년, 변성기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합창대를 떠나면서 고된 방랑생활이 시작된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27세에야 겨우 보헤미아의 모르친 백작 음악대 악장으로 취직했고, 이 해에 [교향곡 1번]을 완성한다.

다음해에는 빈의 가발집 딸 마리아와 결혼하는데, 그녀는 유명한 악처(惡妻)로서 평생 하이든을 괴롭힌 여인이다.
29세에 예술의 열렬한 옹호자 에스테르하지 후작 파울 안톤의 관현악단 부악장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새로운 활동기에 들어가 교향곡을 비롯한 많은 작품을 이곳에서 썼다.

에스테르하지의 관현악단

관현악단을 관리하고 훈련시키는 일은 그의 주 임무였다. 그가 이 일을 맡고 있을 동안은 그의 관현악 작법 실력도 눈에 띄게 발전했다.

1762년에 파울 안톤 후작이 죽었으나 그 뒤를 이은 동생 니콜라우스 후작도 형 못지않은 열렬한 예술 옹호자였다. 그래서 관현악단은 계속적으로 충분한 지원을 받았고, 하이든은 악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얼마 후 니콜라우스 후작이 베르사유 궁전에 자극되어 에스테르하지 궁을 건립하면서 우수한 관현악단도 이곳으로 옮겨졌다.

하이든은 근면하고 성실하여 단원들과의 사이가 극히 원만하였다. 그는 교향곡 외에 단원을 독주자로 하는 협주곡이나 실내악곡도 많이 썼다.
그와 더불어 그의 명성은 전 유럽에 알려졌다. 그러나 58세인 1790년에 니콜라우스 후작이 죽게 되자 관현악단도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하이든은 명예악장으로서 빈으로 거처를 옮겨 생애의 한 전기를 맞게 되었다.

런던 방문

빈의 음악계는 하이든에 대해 냉담했으나 전 유럽에 떨쳐진 그의 명성 때문에 여러 곳에서 악장으로 초빙하겠다는 요청이 왔다.
그러나 하이든은 모든 것을 물리치고 잘로몬이 주최한 연주회의 초대에 응할 결심이었다. 잘로몬은 열렬한 하이든의 숭배자로서 그의 작품을 소개하기 위해 힘써 온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이 늙어버린 하이든에게 이 여행은 대단한 결심을 필요로 했으나 우수한 런던의 대관현악단에 대한 매력이 이것을 감행케 했고, 이 제1차 런던 방문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중 가장 큰 수확은 이른바 [잘로몬 교향곡]중 제93번부터 제98번에 이르는 6곡의 완성이었다.
또 1792년, 런던에서 돌아오는 길에 본에 들러 베토벤을 만나 그의 입문을 허락했다고 한다.

또다시 런던으로

1793년 1월, 61세의 하이든은 또다시 런던 행을 결심했다. 이때에 고전 교향곡의 전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명작 제98번부터 제104번까지의 마지막 6곡의 교향곡이 완성되었다. 영국에서의 하이든의 명성은 여전했다. 냉담했던 빈의 음악계도 영국에서의 명성에 의해 마침내 하이든을 인정했다. 한때 입회를 거부했던 음악예술가협회도 입회금을 면제하고 그의 입회를 허용했다.

충족된 만년

하이든이 영국에 머무는 동안 안톤 후작이 죽고 니콜라우스 2세 후작이 그 뒤를 이었다. 2세 후작은 1세 후작 시대의 문화적 전통을 부활시키기 위해 에스테르하지의 관현악단을 재건하고자 했다.
하이든은 또다시 악장으로 활동을 시작했는데, 무엇보다도 빈을 떠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기쁜 일이었다. 물론 수입도 많았다.

이 무렵, 그의 관심은 ☞ 오라토리오에 쏠려 있었다. 영국에서 들었던 헨델의 작품에 자극을 받았던 것이다.
66세인 1798년에 완성된 [천지창조]는 초연부터 대성황을 이루었으며, 그 소문은 뻐르게 국외에까지 번져 나갔다.

하이든의 만년은 행복했다. 나폴레옹과의 관계가 긴박해 있던 시기에 오스트리아의 국가를 작곡한 것은 특히 감동적인 것이었다.

이미 70세가 다 된 하이든은 이어지는 ☞ 오라토리오 [사계](1801년)를 완성한 후에는 눈에 띄게 건강이 쇠약해졌다. 이제 그는 에스테르하지의 악장직을 그만두고 빈의 명예시민으로서 은퇴하고 오로지 자기 작품의 목록 작성에만 전력하였다.

하이든은 1808년, [천지창조]의 연주회에 출석하여 열광적인 마지막 환호를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1809년 5월 3일, 77세로 생애를 마쳤다.

고전적 기악 형식의 완성

하이든의 가장 큰 공적은 소나타 형식에 의한 고전파 기악 형식의 완성이었다.
이것은 그의 원만한 인격에 의해 비로소 가능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이든은 봉건적인 환경에서 자란 덕분에 윗사람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근면한 음악가였다. 전통적이 감수성을 고지식할 정도로 존중하는 일면도 있었으나, 노령의 나이에도 런던을 두 번씩이나 방문하여 큰 성공을 거두는 진보적인 일면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양면적인 성격이 멋진 균형을 이루어 완벽한 조화를 이룬 것이다.

하이든이 확립한 고전파의 기악 형식은 그 뒤 오랜 생명을 지니고 음악사 발전의 중추적 원동력이 되었고, 그의 음악이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