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7년 1월 31일, 빈 근교 리히텐탈에서 태어났다. 오스트리아 군이 나폴레옹 군과 교전,
☞ 캄포 포르미오 조약이 성립된 해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프란츠는 아버지와 형으로부터 악기 다루는 법을 배우면서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8세부터는 고향의 교회 오르가니스트인 호르차에게 발탁되어 기초 교육을 받았다.
콘빅트에 입학
11세(1808년), 왕립 교회의 아동 합창단원으로서 콘빅트에 입학한 프란츠는 그곳에서 초등교육부터 고등학교까지의 정규과정을 이수함과 동시에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받았다.
이윽고, 변성기에 접어든 16세의 프란츠는, 정든 콘빅트를 떠나 아버지의 일을 돕게된다. 그러나 곧 징병을 피하기 위해 사범학교에 다니게 되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작곡 활동을 펴게 된다.
테레제
1813년에는 [교향곡 제1번]을 비롯하여 몇 곡의 실내악과 리드(가곡)가 쓰여졌다.
슈베르트는 언제부터인가 이 아름다운 소프라노 가수를 사모하게 된다. 그러나 슈베르트의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이 사랑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다.
☞ 보헤미안의 생활
1816년에 슈베르트는 친구 시파운으로부터 소개받은 시인 F. 쇼버와 함께 살게 되면서
☞ 보헤미안의 생활을 체험하게 된다.
그는 여전히 제자나 친구들의 원조에 의지하는 불안정한생활을 계속해 나갔다. 이 시기에 쓰여진 「교향곡 4번」, 「제5번」이나 「음악에 붙여」, 「숭어」, 「죽음과 소녀 등의 리드는 모두 구성과 내용이 완벽한 명작들이다.
명가수 포글
1817년, 쇼버의 소개로 리드 가수로 활약 중인 바리톤 요한 포글을 알게 되었다. 포글은 20살이나 연상이었지만, 그 뒤 슈베르트의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25세인 1822년에는 마침내 악보 출판이 기회가 찾아왔다. 연주회에서 호평을 받은 「마왕」이 Op.1로서 출판되었고, 그 성공에 힘입어 다시 19곡이 간행되었다.
[미완성] 교향곡
23세인 1822년에는 교향곡 제8번 [미완성]도 착수되고 있었다. 이 곡은 시타이어 음악협회 명예회원으로 추천된 데 대한 답례로서 쓰여져 다음 해인 1823년에 협회로 보내졌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제3악장 이하는 보내지지 않았다.
이 해에 그는 또한 [로자문데] 음악의 상연 외에 가곡집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 [물위에서 노래한다], [그대는 나의 안식처] 등 많은 작품을 써서 ‘슈베르트 아데’에서 발표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의 대성공
9월에는 그라츠를 여행하며 자신이 작곡한 곡들의 연주회를 개최하는 등 쾌적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즉흥곡]이나 [악흥의 한 때]를 비롯한 몇 곡을 작곡했다.
그러나 그 후 건강이 나빠져서 11월에 접어들면서 병상에 눕게 되더니 마침내 31세의 생애를 마쳤다. 유해는 본인의 뜻에 따라 베토벤의 무덤 가까이에 매장되었다가 나중에 그 옆자리로 옮겨졌다고 한다.
천성적인 리드 작가
슈베르트 작품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60곡을 헤아리는 주옥 같은 리드이다.
슈베르트는 자유로운 보헤미안의 생활을 즐기면서 천부적인 재능으로 빈의 서민 감정을 작품에 반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