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리오즈

Hector Berlioz

(1803 - 1869, 프랑스)

1803년 12월 11일, 몽블랑이 바라다 보이는 작은 도시 코드 상 탕들레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예술사에 있어서 ☞ 고전주의 에서 ☞ 낭만주의 로 전환하려는 때였고, 나폴레옹의 제1제정(帝政)이 시작되려는 격동의 시기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이 지방의 명문 의사로, 그의 부모는 모두 예술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베를리오즈는 독학으로 음악에의 눈을 떠갔다. 이 무렵 아버지의 서재에서 발견한 ☞ 글룩(Gluck Christph Willibaid)의 오페라 [오르페우스]의 단편에 열중했는데, 이것이 평생 동안 글룩을 숭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의학에서 음악으로

18세인 1821년, 아버지의 뜻에 따라 파리에서 의학을 공부하게 된 베를리오즈는 의학 공부에는 흥미를 갖지 못하고 오페라 극장에 드나들거나 파리 음악원의 도서관에서 ☞ 글룩(Gluck Christph Willibaid)을 연구하면 보냈다.
그는 음악에의 열의가 점점 더해져 마침내는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작곡과 ☞ 대위법을 배운다. 부모는 여기에 반대하여, 학자금을 보내 주지 않았다.

베를리오즈는 빈곤에 허덕이면서도 학업을 계속하여 로마상 수상의 기회를 노렸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여러 번 실패한 끝에 27세인 1830년 8월에 완성한 ☞ 칸타타 [샤르다나팔]로 가까스로 로마상을 획득했다. 이 때는 7월 혁명으로 세상이 어수선한 시기였다.

[환상]의 탄생

이 무렵에는 명작 교향곡 [환상]의 작곡도 꽤 진전되어 있었다. 그는 영국 셰일스피어 극단의 주연 여우 헤리엣 스미드슨을 3년 전부터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대 인기 최고의 여배우와 사랑이 이루어지기는 힘든 일이었다. 번민과 고뇌만이 부질없이 환상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체험의 결정체가 바로 [환상]이다. [환상]의 초연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따라서 그의 소원이던 로마 유학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출발 전에 장래를 약속해던 여류 피아니스트 마리 모크의 일방적인 혼약 파기는 유학 중인 베를리오즈에게 절망을 안겨 주었다.

결국 이 유학에서 아무런 음악적 수확을 얻지 못했다. 이탈리아의 자연에 접한 것과 멘델스존과의 친교만이 그나마 얻은 수확이었다. 그러나 절망의 밑바닥에서 헤어나기 위해서는 창작에 몰두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었다.
[환상]의 속편 [렐리오]의 완성은 그것을 위한 좋은 목표가 되었다.

불행한 결혼과 오페라의 실패

파리로 돌아 온 베를리오즈의 마음에는 다시 스미드슨에 대한 연모의 정이 끊이지 않고 타올랐다. 그러는 가운데 가까스로 30세에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결혼은 실패였다. 그의 부인인 스미드슨은 베를리오즈에게 정신적 부담을 안겨 주기만 할 뿐이었다.

이 무렵부터 가족의 생계 문제도 있어서 평론에 손을 대어 작곡활동과 아울러 새로운 음악운동에 힘을 기울인다. [이탈리아의 헤럴드], [죽은 이를 위한 미사곡] 등의 대작도 완성되어 작곡가로서의 명성도 차츰 높아졌다.

그러나 심혈을 기울여서 완성한 최초의 오페라 [벤베누토 첼리니]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실패는 그를 파산 직전까지 갔으나, 다행히 ☞ 파가니니의 호의에 의해 어느 정도 재기할 수가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에 의한 이색적인 교향곡 [로미오와 줄리엣]은 파가니니에 대한 답례로써 써진 것이다.

[파우스트의 겁벌]

아내와의 불화와 창작의욕의 감퇴는 자연히 국외 연주 여행을 떠나게 만들었다. 43세인 1846년, 오스트리아, 헝가리를 여행하던 도중 전에 작곡했던 [파우스트 8경]을 개작할 생각을 갖고, 마침내 불후의 명작 [파우스트의 겁벌(劫罰)]을 완성하게 된다.

한편, 이 여행을 전후하여 몇 가지 저술이 이루어졌는데 [근대 악기법과 관혁악법]은 나주에 쓰여진 [회상록]과 더불어 유명하다.

그러나 [파우스트]의 상연은 또다시 실패로 끝났다. 그 후 그는 친구와 의논하여 1850년, 파리 필하모니협회를 설립했다. 그러나 이 협회도 1년 후에는 해산되고 만다.

실패의 연속과 만년의 고립

연주여행은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1855년, 런던 연주여행 도중에는 바그너와 재회하여 옛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바그너의 솔직한 성격에서 비롯된 신랄한 비평으로 두 사람 사이는 다시 갈라지고 말았다.

다음 해에는 마침내 학사원 회원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는 고립의 길이 계속된다. 파리의 극장은 [벤베누토]의 실패 이래 베를리오즈의 작품에 대해 굳게 문을 닫아 버렸다.
새로 작곡한 2부로 된 오페라 [트로이인]은 상연도 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오페라에 대한 꿈을 ㅓ리지 못하여 오페라 [베아트리체와 베네딕트]의 작곡을 추진했다.

그러나 1854년에 아내 해리엣의 죽음에서, 1862년의 두 번째 아내의 죽음, 거기에다가 64세인 1867에 닥친 아들 루이의 죽음은 그를 더욱 더 깊은 고독으로 몰아넣었다.
1863년에 어렵게 초연된 [트로이인]도 작품성과는 관계없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867년, 러시아 연주 여행 때에 대환영을 받아 약간의 위한을 받았으나 그 때는 이미 건강상태가 몹시 악화된 후였다.
66세인 1869년 3월 8일, 베를리오즈는 모스크바에서의 [트로이인]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고뇌에 찬 생애를 마쳤다.

서사시직인 작품

베를리오즈의 시대는 사회적으로 예술적으로 낭만 정신이 크게 비약하는 격동기였다. 그러한 시대에 그는 자유정신과 예술적 열정을 한 몸에 불태운 음악가였다.
극히 서사시적(敍事詩的) 경향이 짙은 그의 작풍(作風)은 낭만파 작곡가 리스트나 슈만보다는 바그너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프랑스적인 에스프리로 일관한 점에서 바그너와는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 독자적인 관현악법으로 관현악이 가지는 가능성을 증명하였다. 그가 후세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며, 그러한 점이 오늘날, 프랑스 근대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된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