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델스존

Felix Mendelssohn Bartholdy

(1809 - 1847, 독일)

1809년 2월 3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해는 하이든이 세상을 떠난 해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유명한 유태인 은행가였고 조부 모제스는 유별난 철학자였다. 펠릭스는 4남매의 둘째이자 장남이었다. 그의 누나 판니도 풍부한 음악적 재능의 소유자였다.

축복받은 음악교육

3세인 1812년에 함부르크가 프랑스 군에 점령되지 멘델스존 일가는 베를린으로 옮겨 살았다.
여기에서 그에게 작곡을 가르쳐 준 텔터를 비롯한 좋은 스승을 만나 본격적인 음악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9살 때 공개 석상에서 피아노를 연주하여 신동으로 이름을 떨쳤다.

1822년 이후, 자택에서 관현악을 연주하게 되면서부터는 연주를 위한 관현악곡을 쓰기 시작, 15세인 1824년에 [제1교향곡]을 완성했다.

음악가가 될 결심

유복한 환경에서 완벽한 교육을 받은 멘델스존은 음악뿐 아니라 그림과 문학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825년, 음악가가 될 결심을 굳히고 로시니, 아레비, 마이어베어 등의 음악가와도 사귀었다.

한편으로는 1826년, 베를린 대학에 입학하여 문학이나 고전, 언어학 공부에도 열성을 보였다. 이 해에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위한 서곡이 쓰였는데, 17세 소년의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성숙한 완성도를 보이고 있다.

바흐 부흥 운동

멘델스존은 오래 전부터 J.S. 바흐의 음악에 심취하고 있었다. 당시 바흐의 작품은 거의 잊혀지고 있었다.
그는 20세인 1829년에 [마태수난곡]의 초연 100주면 기념에서 이 곡을 스스로 지휘하고 상연하여, 파묻혀 있던 이 명작을 재인식시키려고 노력했다. 이와 같은 바흐 부흥 운동은 그의 큰 공적 중의 하나이다.

이 해에 그는 영국으로 가, 런던에서 여러 명사를 만났으며, 자신이 작곡한 곡의 지휘나 연주로 호평을 받으며, 런던 필하모니협회이 명예회원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당시 베를린 악단에서 실력자 스폰티니의 미움을 사서 냉대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이런 호평은 큰 희망을 안겨 주었다. 그 뒤에도 그는 자주 영국을 방문한다.

스코틀랜드에서 이탈리아로

런던을 방문한 뒤 그는 다시 스코틀랜드로 가서 수도 에딘버러의 호릴루드를 방문하여 [제3교향곡]의 착상을 얻었고 또 헤브리디즈 군도를 여행한 인상은 서곡 [핑갈의 동굴]로서 결실을 맺는다.

다음 해인 1830년, 그는 이탈리아의 로마에 머물게 되는데, 때마침 구경할 수 있었던 사육제와 그레고리우스 6세의 장엄한 취임식 장면은 제4교향곡 [이탈리아]로 결정을 보게 된다.
4년여에 걸친 이 대 여행은 창작 면에서도 큰 수확이 있었으며, 로마에서 베를리오즈를,파리에서 리스트를, 런던에서 필드 등을 만나 세계적인 음악가들과 교제를 맺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

25세인 1834년에는 뒤셀도르프 시의 악장으로 임명되었고, 1835년에는 라이프치히이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 지휘자로 취임한다. 이후 이 도시는 그의 음악활동의 중심 무대가 된다.

그의 첫 번째 목표는 관현악단의 개혁이었다.
몇 년 되지 않아 자신의 관현악단을 유럽 제일의 연주단체로 만들었다. 그는 또 이 곳 라이프치히에서 16세였던 클라라 비크(슈만)를 쇼팽에게 소개했으며, R. 슈만을 만난것도 이곳에서였다.

다음 해인 1837년에는 총명하고 정숙한 아내를 맞아 행복한 새 생활을 시작하였다.
1838년에는 슈만이 빈에서 발견한 슈베르트의 [교향곡 제9번]을 초연했다.

32세인 1841년, 프러시아 왕의 초청으로 베를린 예술원의 음악부장에 취임했으나 주변에서는 그를 탐탁히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사임을 원했으나 왕의 특별한 요청으로 계속 머무르게 된다.

그러는 동안에도 창작활동은 계속되어 1841년에는 피아노를 위한 [엄숙한 변주곡]이 쓰였고 다음 해에는 제3교향곡 [스코틀랜드]도 완성되어 라이프치히에서 초연되었다.

라이프치히 음악원 창설

가까스로 베를린에서의 직책을 사임한 멘델스존은 라이프치히에 음악원 창립 계획을 세운다. 작센 왕으로부터 자금을 얻어 1843년에 개교한 이 음악원에서 그 자신이 피아노와 작곡을 가르쳤고, 슈만, M. 하우프트만, F. 다비트 등 쟁쟁한 교수진으로 구성되었다.
이 음악원은 독일음악의 새로운 중심지의 하나가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창작활동도 잘 이루어져 오래 전부터 프러시아 왕이 부탁했던 [한여름 밤의 꿈]을 위한 음악이 15년 전에 작곡한 서곡과 함께 이 해에 상연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명작인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가 완성되었다.

[엘리아]의 완성과 마지막 반영

35세인 1844년, 라이프치히에 귀임한 멘델스존은 ☞ 오라토리오 [엘리아]를 완성하기 위하여 노력을 집중한다.
37세에는 영국 방문 여행을 떠나 버킹검 음악제에서 갓 완성한 [엘리아]를 초연했다. 그러나 대작의 완성과 그 초연을 위한 여행에 지친 나머지, 귀국한 후 지휘자와 음악학교에서의 지위를 떠났다.

1847년, 마지막 영국 방문 여행 중 사랑하는 누나 판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신경장애를 일으켰고, 결국 11월 4일, 라이프치히에서 38년의 생애를 마쳤다.

충족된 행복감

멘델스존은 음악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윤택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행복감이 넘치고 때로는 충족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야릇한 감상을 담고 있다. 고전적 문헌에 대한 그의 깊은 조예와 풍부한 교양으로 뒷받침된 그의 훌륭한 인품은 가히 돋보일 만하다 하겠다. 특히 바흐의 작품을 부흥시킨 것은 큰 공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