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

Frederic Francois Chopin

(1810 - 1849, 폴란드)

2월 22일 바르샤바 근교의 젤로조바볼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니콜라스는 폴란드에 귀화한 프랑스 인이고 어머니는 폴란드의 귀족 출신이었다.
프레데릭은 두 사람 사이의 장남이었고 누나인 루드비카와 두 여동생이 있었다.

어머니에게서 음악의 기초를 배운 뒤 지브니로부터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운 프레데릭은 일찍부터 음악적인 재능을 나타내어 8세인 1818년에 바르샤바에서 최초의 연주회를 가졌다.

바르샤바 음악원 시대

우수한 성적으로 중학교를 졸업한 프레데릭은 음악가로서 독립할 것을 결심하고, 16세인 1826년에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음악 수업을 받았다.
중학교 시절부터 작곡을 가르쳐 온 엘스너는 쇼팽의 장점을 잘 파악하여 그 독창성을 기르기 위해 지도해 준 좋은 스승이었다.

베를린을 여행한 데 이어 19세인 1829년에는 동경하던 빈을 여행하면서 유럽 음악계를 관찰하고 자작의 연주회를 열어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음악원시대에 소프라노 가수 콘스탄치아 글라도코프스카에게 연모의 정을 품었는데, 이 연정은 [피아노 협주곡 f단조]와 [원무곡] Op.70에 반영된다.

빈에서 파리로

20세인 1830년, 바르샤바에서 두 번째 연주회를 열어 성공을 거둔 쇼팽은 또다시 빈으로 음악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이 여행을 시점으로 조국 폴란드와는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빈에서의 두 번째 연주회는 성과를 얻지 못했으며, 폴란드에 혁명이 일어나 오스트리아에는 정치적으로 반(反) 폴란드 감정이 고조되어 있었다.

실의에 빠져 지내던 쇼팽은 빈을 떠나 파리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조국의 패배를 알게 되어, 연습곡 Op.10의 12[혁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1830년, 7월 혁명을 겪고 난 파리는 자유롭고 혁명적인 ☞ 낭만주의 예술이나 문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 정치적으로는 폴란드와 우호적인 관계가 되어 쇼팽을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그는 리스트, 멘델스존을 비롯하여 로시니, 케루비니, 베를리오즈, 벨리니, 마이어베어 등의 음악가, 하이네나 드라크로와등의 시인, 화가와도 사귀었다.

또 1835년에는 여행 도중 라이프치히에 들러, 진작부터 열렬한 쇼팽 예찬자였던 R. 슈만이나 클라라 비크(훗날 슈만의 부인)에게 소개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그의 창작 의욕은 크게 자극되어 [발라드 1번], Op.25의 [연습곡]을 비롯하여 녹턴, 마주르카, 왈츠 등이 쓰여졌다.

조르즈 상드

파리 낭만주의 운동의 중심은 살롱이었다. 쇼팽도 살롱에 드나들면서 많은 벗을 얻게 되는데, 상류사회와의 접촉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그의 귀족 취미를 만족시켰고, 여류 명사들과의 교우는 정열적인 영감의 원칙을 이루어 갔다.
그러나 파리에서 쇼팽은 이미 두 번의 연애를 경험했으나 모두 결실을 보지 못한다.

26세인 1836년, 그는 다구 백작부인의 살롱에서 리스트로부터 유명한 여류작가 조르즈 상드를 소개받는다. 그녀는 연애 편력이 대단하여 이미 남편과 자녀가 있는 처지이면서도, 나약하고 여성적인 쇼팽에게 이끌려 두 사람은 얼마 후 연애관계로 들어간다.
쇼팽은 1837년에 영국을 방문한 이래 심한 결핵으로 시달리고 있었는데, 그런 쇼팽을 보살펴 주는 상드의 애정은 그때까지의 그녀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모성적인 것이었다.

1838년, 두 사람은 남구의 마조르카 섬에서 요양생활을 보내는데, 이때 상드의 씩씩하고 강한 성격의 영향으로 쇼팽의 창작 활동은 이 무렵에 절정을 이루게 된다.
[24개의 전주곡집]과 두 개의 [소나타]를 비롯한 그의 대표적 걸작이 잇따라 써졌으나 건강 상태는 호전될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최후의 연소

36세인 1846년, 상드의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문제가 발생하여 두 사람의 9년간에 걸친 사랑은 깨지고야 만다. 상드가 떠나고 나자, 실의와 고독에 빠진 쇼팽의 건강상태는 급격히 악화되어 작곡도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갔다.

1848년, 파리에서 마지막 연주회를 끝낸 쇼팽은, 예전에 제자였던 스코틀랜드 부호의 딸의 부탁으로 영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빅토리아 여왕 앞에서의 연주를 포함한 7개월 남짓한 여정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온 쇼팽의 병상은 극도로 악화되어 자곡활동은 거의 중단상태가 되었다.

다음 해인 1849년에 누나 루드비카가 그를 간호하려고 달려와 주었으나 이미 쇼팽의 병은 재기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끝내 그 해 10월 17일, 쇼팽은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파리에 매장되었는데, 20년 전 폴란드를 떠날 때 지니고 온 고국의 흙이 그 위에 뿌려졌다고 한다.

꽃 속에 숨겨진 대포

쇼팽은 여성적인 섬세한 감각과 서정성을 지닌 천성적인 낭만주의자였다. 특히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주옥같은 피아노곡을 많이 남겼다.
그러나 그의 작품의 이면에는 강한 정신이 담겨져 있는데, 슈만은 이런 면을 평하여 “꽃 속에 숨겨진 대포”라고 말했다.

이 같은 기백은 러시아의 탄압에 대항하려는 조국 폴란드에 대한 애국심에 뿌리박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폴란드의 민속 무곡 [마주르카]를 비할 데 없는 예술음악으로 완성시킨 그의 정열과 투혼, 그것도 역시 폴란드의 정신에서 발로된 것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