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만

Robert Schumann

(1810 - 1856, 독일)

6월 8일, 작센지방의 츠비카우에서 태어났다.
슈만의 아버지는 교양 있는 서적상이었고 어머니는 가창력이 아주 뛰어난 분이었다. 어머니 쪽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슈만은 일찍이 음악적 재능을 나타내어 7세 때부터 작곡을 시작했고 10세 때에는 오르간 곡을 썼다고 한다.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에게 피아노를 배우며 음악적인 노력을 기울리면서도 닥치는 대로 독서를 즐겨 스코트나 바이런에 심취했고, 장 파울에게는 평생 변치 않는 경의를 품고 있었다.
또 슈베르트의 리드에 접하고 나서는 시와 음악의 완전한 융합에 큰 감명을 받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피아니스트를 단념

16세인 1826년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희망에 따라 법률을 배우기 우해 라이프치히 대학과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다니게 된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20세인 1830년에는 마침내 어머니의 허락을 얻어 다시 음악의 길에 전념하게 된다.
작곡은 H. 도론에게, 피아노는 Fr. 버크에게 배우기 시작했으나 조급하게 무리한 연습을 한 나머지 오른쪽 무명지를 다쳐 피아니스트로서의 꿈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그 후로 창작에만 전력을 쏟게 되지만 그 대상이 여전히 피아노곡에 집중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타고난 문학 애호심이 음악 문필활동으로 발휘되어 갔다.

신음악 신보

1930년 이후의 유럽사회는 ☞ 봉건주의 에서 ☞ 시민사회 로 이행하는 격동기로서 혁명과 반동이 복잡한 세력 관계를 나타내고 있었다.
한편, 베토벤이나 슈베르트를 비롯한 대가를 잇따라 상실한 음악계는 여전히 형식주의에 지배되고 있었다.
이러한 풍조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슈만은 1834년에 <신음악 시보(時報)>를 창간하여, 보수적이고 형식적인 음악에 대한 반기를 들었다.

그는 플로레스탄, 오이제비우스 등의 필명으로 논문과 평론을 지면에 발표하여 근대 음악 비평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당시 무명이었던 쇼팽이나 브람스도 그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 케이스다.

한편, [교향연습곡], [사육제], [어린이 정경] 등 명작 피아노곡이 완성되었으나 그 당시에는 많은 청주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클라라와 가곡의 해

26세인 1836년, 그는 스승 비크의 딸인 일류 피아니스트 클라라에게 정식으로 결혼을 신청했으나 비크는 슈만의 생활이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두 사람이 사이을 떼어놓기 위해 비크는 딸을 데리고 연주여행을 떠나고 만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더욱 견고해질 뿐이었다. 끝내 재판까지 벌인 끝에 결혼에 이르게 되는 슈만과 클라라의 사랑이야기는 낭만파의 맹장 슈만다운 신화가 아닐 수 없다.
그러는 동안에도 창작활동은 쉬지 않고 계속되었고 클라라의 조력으로 음악가로서의 지위는 착실하게 구축이 되었다.

1840년, 결혼을 하고 난 뒤의 창작 영역은 더욱 넓어져, 이 해에는 [여자의 사랑과 생애], [시인의 사랑] 등의 가곡집을 포함하여 138곡에 이르는 리드가 쓰여진 “가곡의 해“였다.
이 곡들은 하나같이 클라라를 얻은 기쁨과 사랑을 노래한 작품이었다.
다음 해부터는 더욱 규모가 큰 기악곡 창작이 시작되는데, 이 해의 [제1교향곡]을 필두로 피아노5중주곡이나 4중주곡이 연이어 쓰였다.

라이프치히에서 드레스덴으로

1843년, 멘델스존은 자신이 창설한 라이프치히 음악원의 교수로서 슈만을 초빙하였다.
두 사람의 교우는 이미 오래 전부터였으나 예술적 경향의 차이 때문에 멘델스존은 슈만을 이해하지 못했고 슈만 역시 교직이 적성에 맞지 않아 1년 만에 결별을 하고 만다.

슈만은 드레스덴으로 옮겨 개인교수나 합창단의 지휘자로 근무하면서 다시 창작에 몰두했다. 드레스덴 시절의 작품으로는 [제2교향곡]이나 [피아노3중주곡 제2번] 등이 있다.

1850년에는 뒤셀도르프 시의 지휘자로서 초빙되어 3년간 재직하게 된다.
그런데 몇 년째 발작을 보여 오던 정신병(精神病)이 이곳에서 결정적인 징후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안타까운 정신착란

정신착란 증세가 빈번해져 지휘자로서의 지위를 사임한 뒤에도 클라라와의 연주여행은 자주 행해지고 있었다.
1853년, 무명의 청년 음악가 브람스가 슈만을 처음으로 찾아왔다.
이미 이 후배의 재능을 읽은 슈만은 브람스와 친교를 맺고 그 관계를 오래도록 지속하였다.
그러나 한때 소강상태를 유지하던 정신병이 재발하여 환상과 환청에 시달리던 어느 날, 갑자기 방에서 뛰쳐나가 라인강에 투신하는 사건이 발생을 하게 된다.
다행히 구제되어 정신병원에 입원했으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2년 뒤인 1856년 7월 29일, 46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근대적 정신의 소유자

풍부한 감성과 문학에 대한 깊은 이해는 슈만을 독일 낭만파의 지도적 음악가의 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특히 문필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점은 근대적 정신을 가진 음악가라는 점을 말해 주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같은 낭만주의자였던 바그너의 대작주의와는 대립된다.
슈만은 쇼팽과 리스트를 세상에 소개하는 데도 공적이 컸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쇼팽과는 이질적이며, 오히려 브람스의 풍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