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트

Franz von Liszt

(1811 - 1886, 헝가리)

1811년 10월 22일,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라이딩에서 태어났다.
대단한 음악 애호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프란츠도 일찍부터 음악에 친숙해져 9세 때 피아노 연주회를 열었다.
그것이 크게 성공하여 그 고장의 귀족들로부터 6년간의 학비를 보증 받고 빈에서 체르니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살리에르에게서는 작곡을 배우게 된다.

12세인 1823년, 빈에서 제2회 연주회를 가졌는데, 마침 그 자리에 와 있던 베토벤으로부터 크게 찬사를 받았으며 그 무렵 슈베르트에게도 소개되기에 이른다.

연주 여행의 시작

1823년, 아버지와 함께 파리로 가서 음악원에 입학하려 했으나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개인교수에게 작곡을 배우게 된다.
한편, 다음 해의 런던 여행을 시작으로 파리를 거점으로 한 연주여행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 시기에 작곡가로서 데뷔했으나 아직 연주가로서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했다.
16세인 1827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연주여행을 중단하고, 이후 수년 간 파리에 머물며 음악교사 생활을 하게 된다.

파리에서의 교우

1830년 이후, 리스트는 파리의 살롱에 드나들며 많은 예술가들과 친교를 맺게 되었다.
당시 귀족들이 경영하고 있던 파리의 살롱은 쟁쟁한 예술가나 지식인들의 사교장이었으며 프랑스 예술 활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리스트’가 살롱에서 만난 사람은 ‘쇼팽’, ‘베를리오즈’ 등의 음악가를 비롯하여 ‘위고’, ‘샤토브리앙’, ‘라마르틴’, ‘조르즈 상드’ 등의 문학가, 사회사상가인 ‘생 시몽’ 등이었다.

미모의 백작부인 ‘마리 다구’와 알게 된 것도 그녀의 살롱에서였다.
두 사람은 깊은 연애관계까지 맺게 되어 나중에 바그너의 부인인 된 ‘코지마’를 낳는다.

28세인 1839년부터는 연주여행이 활발해지고 유럽 각지에서 큰 성공을 거두어 거장의 이름을 한껏 떨쳤다.
이 무렵부터 [초절(超絶) 기교 연습곡]이나 [피가니니 연습곡]과 같은 기교어린 작품이 쓰여지기 시작한다.

바이마르의 지도자

31세인 1842년, ‘리스트’는 바이마르 궁정의 음악감독, 지휘자로 취임하여, 매년 3개월간 이 곳에서 근무하게 된다. 그의 직무는 연주여행이 중요한 일정으로 되어 있었다.

1848년부터는 바이마르로 이주했고, 다음 해 그를 뒤따라 온 ‘비트겐시타인’ 후작 부인 ‘카로리네’와 사랑의 보금자리를 꾸미게 된다.
이리하여 바이마르는 ‘리스트’의 새로운 활동 거점이 되었고 ‘바그너’, ‘베를리오즈’, ‘슈만’ 등의 작품이 적극적으로 상연되었다.

한편, 창작 활동은 절정기를 맞아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 [전주곡]을 비롯한 일련의 교향시, [파우스트 교향곡] 등의 중요 작품이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교사로서의 활동도 계속되어 그 문하생 중에서는 ‘뷜로’, ‘타우지히’ 등의 영재가 배출되었다. 이러한 리스트의 다방면에 걸친 활동에 의해 바이마르는 어느 새 독일 예술의 중심지로서 ‘괴테’, ‘실러’에 의한 지난날의 전성기를 방불케 했다.

명상의 시대

49세인 1858년, 바이마르의 공직에서 물러나고, 이듬해 ‘카로리네’와의 정식 결혼허가를 얻기 위해 로마의 교황을 방문하지만 뜻하지 않은 파국이 두 사람 앞에 닥쳤다. 낙담한 ‘리스트’는 그대로 로마에 머물며 종교음악에의 정진을 결심한다. 그러나 ‘리스트’ 자신이 “명상의 시대”라고 생각한 이 시기도 교황 ‘피오 9세’의 죽음으로써 급속히 종지부를 찍고 만다. 1869년, 바이마르로부터의 복귀 요청에 따라 다시 바이마르로 돌아가지만 종교음악에 정진한 후로는 항상 흑의(黑衣)를 걸치고 있었다고 한다. 1871년, 고국 헝가리의 왕으로부터 국립 음악학교의 개혁을 부탁 받고 부타페스트 음악학교 교장으로 취임한다. 그리고 이것을 계기로 고국에서의 연주와 교육활동도 왕성하게 전개된다.

바그너와의 친교

‘바그너’는 ‘리스트’의 사위이기도 하지만 그와 절친한 관계로 이 두 음악가의 성격은 여러 면에서 공통적인 데가 많았다.
만년의 ‘리스트’는 ‘바그너’의 큰 이상을 실현하는 데 함께 했다. 그런 만큼 72세인 1883년에 ‘바그너’를 잃고 난 ‘리스트’의 슬픔은 누구보다도 컸다.

1886년, 그의 탄생 75주년을 축하하는 음악제가 각지에서 개최되어 ‘리스트’는 런던, 파리를 거쳐 바이로이트로 향했으나 도중에 폐렴이 걸려 7월 31일, 바이로이트에서 사망했다.

행동적인 낭만주의자

‘리스트’가 음악사에 남긴 가장 큰 공적은 ‘바그너’와 함께 낭만주의 음악을 크게 발전시킨 점에 있다.
이 두 사람의 적극적인 행동성에 비해서 같은 낭만파에 속한 ‘슈만’이나 ‘브람스’의 활동은 보수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의 인생을 다채롭게 했던 이 행동성은 화려하고 외향적이면서도 왕성한 설득력을 가진 교향시적인 작풍(作風)에 가장 잘 반영되었다.
‘리스트’가 교향시의 완성자라고 불리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또 ‘쇼팽’과는 다른 화려한 거장적 피아노 연주법의 개척도 이러한 성격에서 유래한 것인지도 모른다.

‘바그너’를 비롯한 ‘그리그’나 ‘스메타나’ 등 동(同)시대 음악가들에게 적극적이니 원조와 격려를 아끼지 않은 것도 그의 위대한 공적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