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년 10월 22일,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라이딩에서 태어났다. 12세인 1823년, 빈에서 제2회 연주회를 가졌는데, 마침 그 자리에 와 있던 베토벤으로부터 크게 찬사를 받았으며 그 무렵 슈베르트에게도 소개되기에 이른다.
연주 여행의 시작
1823년, 아버지와 함께 파리로 가서 음악원에 입학하려 했으나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개인교수에게 작곡을 배우게 된다.
이 시기에 작곡가로서 데뷔했으나 아직 연주가로서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했다.
파리에서의 교우
1830년 이후, 리스트는 파리의 살롱에 드나들며 많은 예술가들과 친교를 맺게 되었다.
미모의 백작부인 ‘마리 다구’와 알게 된 것도 그녀의 살롱에서였다.
28세인 1839년부터는 연주여행이 활발해지고 유럽 각지에서 큰 성공을 거두어 거장의 이름을 한껏 떨쳤다.
바이마르의 지도자
31세인 1842년, ‘리스트’는 바이마르 궁정의 음악감독, 지휘자로 취임하여, 매년 3개월간 이 곳에서 근무하게 된다. 그의 직무는 연주여행이 중요한 일정으로 되어 있었다.
1848년부터는 바이마르로 이주했고, 다음 해 그를 뒤따라 온 ‘비트겐시타인’ 후작 부인 ‘카로리네’와 사랑의 보금자리를 꾸미게 된다.
한편, 창작 활동은 절정기를 맞아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 [전주곡]을 비롯한 일련의 교향시, [파우스트 교향곡] 등의 중요 작품이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명상의 시대
49세인 1858년, 바이마르의 공직에서 물러나고, 이듬해 ‘카로리네’와의 정식 결혼허가를 얻기 위해 로마의 교황을 방문하지만 뜻하지 않은 파국이 두 사람 앞에 닥쳤다. 낙담한 ‘리스트’는 그대로 로마에 머물며 종교음악에의 정진을 결심한다.
그러나 ‘리스트’ 자신이 “명상의 시대”라고 생각한 이 시기도 교황 ‘피오 9세’의 죽음으로써 급속히 종지부를 찍고 만다.
1869년, 바이마르로부터의 복귀 요청에 따라 다시 바이마르로 돌아가지만 종교음악에 정진한 후로는 항상 흑의(黑衣)를 걸치고 있었다고 한다.
1871년, 고국 헝가리의 왕으로부터 국립 음악학교의 개혁을 부탁 받고 부타페스트 음악학교 교장으로 취임한다. 그리고 이것을 계기로 고국에서의 연주와 교육활동도 왕성하게 전개된다.
바그너와의 친교
‘바그너’는 ‘리스트’의 사위이기도 하지만 그와 절친한 관계로 이 두 음악가의 성격은 여러 면에서 공통적인 데가 많았다.
1886년, 그의 탄생 75주년을 축하하는 음악제가 각지에서 개최되어 ‘리스트’는 런던, 파리를 거쳐 바이로이트로 향했으나 도중에 폐렴이 걸려 7월 31일, 바이로이트에서 사망했다.
행동적인 낭만주의자
‘리스트’가 음악사에 남긴 가장 큰 공적은 ‘바그너’와 함께 낭만주의 음악을 크게 발전시킨 점에 있다.
‘바그너’를 비롯한 ‘그리그’나 ‘스메타나’ 등 동(同)시대 음악가들에게 적극적이니 원조와 격려를 아끼지 않은 것도 그의 위대한 공적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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