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과 문화도시로 이음이 높았던 작센의 대도시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바그너’가 태어난 지 5개월 후 라이프치히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아버지는 연극을 무척 좋아한 경찰 서기였으나 '바그너'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티푸스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그 뒤 9개월 만에 궁정극장의 배우 ‘가이어’와 재혼을 했다. 어렸을 때의 '바그너'는 ‘가이어’의 영향으로 연극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랐는데, 그림을 좋아하던 계부(繼父)는 그를 화가로 만들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가이어’도 '바그너'가 8세 되던 해 세상을 떠나고, '바그너'는 숙부에게 맡겨져 초등교육을 받으면서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에 ‘베버’의 「자유의 사수」에 심취한 소년 '바그너'는, 얼마 후 ‘베토벤’의 음악에 접하고, 「제9교향곡」의 사보(寫譜)와 피아노 편곡에 열중하였다.
방랑의 청년시대
18세인 1831년, 라히프치히 대학에 입학한 '바그너'는 혁명 후 자유주의적인 풍토 속에 휩쓸려 방탕한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차츰 자기혐오에 빠지면서 본격적인 음악수업에 몰입했다.
21세인 1834년, ‘베토만 오페라단’의 지휘자로 있을 때 첫 아내가 될 여배우 ‘민나’와 알게 되었고 오페라 『연애금제(戀愛禁制)』에 착수한다.
빚에 쪼들리던 '바그너'는 마침내 뜻을 굳히고 남모르게 짙은 안개를 뚫고 런던으로 갔다가 26세인 1839년에는 파리로 건너갔다.
왕립 작센 궁정지휘자
28세인 1841년, 고국 작센의 수도 드레스덴 궁정극장에서 『리엔치』를 공연하겠다는 쾌보가 날아오고, 베를린 극장에서는 『방황하는 네덜란드 인』에 대한 공연통지가 날라 들었다.
1843년, 『방황하는 네덜란드 인』이 드레스덴에서 초연된 데 이어 그는 마침내 왕실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바쁜 연주 활동 가운데서도 왕성한 창작 활동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1845년에 『탄호이저』, 1847년에 『로엔그린』등의 문제작이 갖가지 논란을 빚으면서 상연되었다.
망명의 시대
35세인 1848년, 파리에서 일어난 2월 혁명의 여파는 전유럽으로 파급되었다. 왕정의 지휘자로서 회의를 느끼고 있던 '바그너'는 스스로 드레스덴의 혁명 운동에 쫓기는 몸이 된다.
베젠돈크 부인과의 사랑
뉴욕 실크거래소의 유럽 대표자 ‘베젠돈크’는 취리히 시대의 유력한 바그너 보호자였다. 그의 젊은 아내 ‘마틸데’는 바그너의 제자였으나 사제관계는 이윽고 열렬한 연애관계로 발전해 갔다.
‘마틸데’의 시에 곡을 붙인 『온실에서』를 비롯한 5곡의 가곡이 이 시기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성을 되찾아 파국은 면하게 된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1859년,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완성은 이 망명시대의 가장 큰 수확이었다. 49세인 1826년, 추방이 완전히 해제되어 다시 자유로운 활동에 돌입할 기회가 왔는데, 이 해에는 명랑한 『마이스터징거』의 대본도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그의 요청으로 뮌헨 왕궁의 궁정지휘자가 된 '바그너'는 젊은 국왕의 후대를 받으며 다시 예술혁신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58세인 1871년, '바그너'는 자신의 작품을 상연하기 위한 극장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미 너무나 유명해진 대가 '바그너'의 이 계획은 국왕을 비롯한 많은 지지자를 얻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63세인 1876년, 마침내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이 완성되었고, 『니벨룽겐의 반지』를 초연으로, 역사적인 개관을 보게 되었다. 그는 자택도 바이로이트에 마련하였다. 이후 이 땅은 명실공히 '바그너'의 음악의 성지로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내부
'니체'와의 결별
추방이 해제된 뒤 동분서주하던 시대로부터 그에게는 새로운 운명이 싹트고 있었다. 이미 ‘민나’와 별거 중이었던 '바그너'는 ‘리스트’의 딸 ‘코지마’를 알게 되어 두 사람 사이는 급속히 진전되어 가고 있었다.
24세의 소장 철학자 ‘니체’를 알게 된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종막의 코러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이 설립된 후 '바그너'의 활동은 더욱 왕성해져 갔다.
마침내 마지막 작품 『파르지팔』이 완성되어 축제극장에서 초연되었으나 지휘자의 건강이 좋지 않아 제3막 중간부터는 '바그너'가 직접 지휘봉을 잡게 되었다.
다음 해인 1883년 2월 11일, 『인간성에 있어서의 여성적인 것에 대하여』를 베네치아의 숙소에서 기초하고, 12일 밤은 가족과 단란한 한 때를 보낸 뒤 혼자서 『라이의 황금』의 끝막 코러스를 피아노로 연주했다.
종합예술의 이상
'바그너'는 시와 음악과 무대를 완전히 종합한, 이른바 악극(樂劇)을 창조하려는 데 이상을 두었다.
그는 같은 낭만파인 ‘슈만’이나 ‘브람스’와는 달리 외향적이고 활동적인 천재로 열렬한 숭배자를 많이 가지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너무나 공격적인 성격 때문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까지도 적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