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

Wilhelm Richard Wagner

(1813 - 1883, 독일)

상업과 문화도시로 이음이 높았던 작센의 대도시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바그너’가 태어난 지 5개월 후 라이프치히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아버지는 연극을 무척 좋아한 경찰 서기였으나 '바그너'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티푸스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그 뒤 9개월 만에 궁정극장의 배우 ‘가이어’와 재혼을 했다.

어렸을 때의 '바그너'는 ‘가이어’의 영향으로 연극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랐는데, 그림을 좋아하던 계부(繼父)는 그를 화가로 만들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가이어’도 '바그너'가 8세 되던 해 세상을 떠나고, '바그너'는 숙부에게 맡겨져 초등교육을 받으면서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에 ‘베버’의 「자유의 사수」에 심취한 소년 '바그너'는, 얼마 후 ‘베토벤’의 음악에 접하고, 「제9교향곡」의 사보(寫譜)와 피아노 편곡에 열중하였다.

방랑의 청년시대

18세인 1831년, 라히프치히 대학에 입학한 '바그너'는 혁명 후 자유주의적인 풍토 속에 휩쓸려 방탕한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차츰 자기혐오에 빠지면서 본격적인 음악수업에 몰입했다.
토마스 교회에서 만난 ‘바인리히’는 그에게 음악이론을 가르쳐 큰 발전을 가져다준다.
19세인 1832년, 처녀작으로 오페라 『혼례』를 썼고, 다음 해 뷔르츠부르크에서 합창지휘자로 취임하여, 이때부터 음악의 편력시대가 시작된다.

21세인 1834년, ‘베토만 오페라단’의 지휘자로 있을 때 첫 아내가 될 여배우 ‘민나’와 알게 되었고 오페라 『연애금제(戀愛禁制)』에 착수한다.
이 오페라는 당시의 문학혁명운동이었던 ‘젊은 독일’의 사상을 담은 것이었다. ‘베토만 오페라단’이 해산된 뒤 ‘민나’와 결혼했고, 24세인 1837년에는 리가에서 극장 지휘자가 되었으나 2년 후에는 이 극장도 해산되고 만다.

빚에 쪼들리던 '바그너'는 마침내 뜻을 굳히고 남모르게 짙은 안개를 뚫고 런던으로 갔다가 26세인 1839년에는 파리로 건너갔다.
적당한 일자리가 없어 음악잡지에 투고나 사보(寫譜), 교정 등 삯일로써 가까스로 굶주림을 면하는 세월이 몇 년이나 계속되었다. 이러한 고난의 기간 동안에 최초의 본격적 오페라 『리엔치』와 『방황하는 네덜란드 인』이 쓰여졌다.

왕립 작센 궁정지휘자

28세인 1841년, 고국 작센의 수도 드레스덴 궁정극장에서 『리엔치』를 공연하겠다는 쾌보가 날아오고, 베를린 극장에서는 『방황하는 네덜란드 인』에 대한 공연통지가 날라 들었다.
감격에 들떠 파리를 떠난 '바그너'는 귀국 도중에 라인강을 바라보며 ‘조국 독일에 영원히 성실할 것을 맹세한다’고 자신의 조국에 대한 심정을 적었다.

1843년, 『방황하는 네덜란드 인』이 드레스덴에서 초연된 데 이어 그는 마침내 왕실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바쁜 연주 활동 가운데서도 왕성한 창작 활동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1845년에 『탄호이저』, 1847년에 『로엔그린』등의 문제작이 갖가지 논란을 빚으면서 상연되었다.

망명의 시대

35세인 1848년, 파리에서 일어난 2월 혁명의 여파는 전유럽으로 파급되었다. 왕정의 지휘자로서 회의를 느끼고 있던 '바그너'는 스스로 드레스덴의 혁명 운동에 쫓기는 몸이 된다.
한때 바이마르에 있는 ‘리스트’에게 몸을 숨겼으나 마침내 독일에서 몸둘 곳이 없게 되자 스위스의 취리히로 향했다.

『혁명과 예술』을 비롯한 이론적인 저술은 이 시기에 이루어졌는데, 여기에는 철학자 ‘포엘 바흐’의 영향이 엿보였고, 『미래의 예술작품』이나 「오페라와 드라마」에 제시된 종합예술의 이론은 훗날의 대작 『니벨룽겐의 반지』에 의해 구체적으로 열매를 맺는다.
그 자신은 이 시기의 9년 동안을 ‘취리히 시대’라고 부르곤 하였다.

베젠돈크 부인과의 사랑

뉴욕 실크거래소의 유럽 대표자 ‘베젠돈크’는 취리히 시대의 유력한 바그너 보호자였다. 그의 젊은 아내 ‘마틸데’는 바그너의 제자였으나 사제관계는 이윽고 열렬한 연애관계로 발전해 갔다.

‘마틸데’의 시에 곡을 붙인 『온실에서』를 비롯한 5곡의 가곡이 이 시기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성을 되찾아 파국은 면하게 된다.
그 이후에 작곡된 『트리스탄』에는 이때의 연애체험이 농후하게 반영되었다. 또 ‘쇼펜하우어’의 염세철학에 심취하여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1859년,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완성은 이 망명시대의 가장 큰 수확이었다. 49세인 1826년, 추방이 완전히 해제되어 다시 자유로운 활동에 돌입할 기회가 왔는데, 이 해에는 명랑한 『마이스터징거』의 대본도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또한 비평가 ‘한슬릭’과 적대 관계가 시작한 것도 이 해였다. 소수의 지지파와 다수의 반대파 사이를 동분서주하고 있던 '바그너'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친 것은 바이레은 국왕 ‘루트비히 2세’였다.

그의 요청으로 뮌헨 왕궁의 궁정지휘자가 된 '바그너'는 젊은 국왕의 후대를 받으며 다시 예술혁신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필생의 대작인 『니벨룽겐의 반지』를 완성하게 된 것도 국왕의 영향이 컸다.

58세인 1871년, '바그너'는 자신의 작품을 상연하기 위한 극장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미 너무나 유명해진 대가 '바그너'의 이 계획은 국왕을 비롯한 많은 지지자를 얻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63세인 1876년, 마침내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이 완성되었고, 『니벨룽겐의 반지』를 초연으로, 역사적인 개관을 보게 되었다. 그는 자택도 바이로이트에 마련하였다. 이후 이 땅은 명실공히 '바그너'의 음악의 성지로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내부

'니체'와의 결별

추방이 해제된 뒤 동분서주하던 시대로부터 그에게는 새로운 운명이 싹트고 있었다. 이미 ‘민나’와 별거 중이었던 '바그너'는 ‘리스트’의 딸 ‘코지마’를 알게 되어 두 사람 사이는 급속히 진전되어 가고 있었다.
당시 ‘코지마’는 '바그너'의 제자였던 ‘한스 폰 뷜로’의 아내로서, 세 자녀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부부는 모두 '바그너' 음악의 열렬한 숭배자로서 스승을 포함한 세 사람의 기묘한 공동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그와 ‘코지마’ 사이에는 두 딸과 장남 ‘지그프리트’가 태어났고, ‘민나’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57세인 1870년 8월,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을 하여 뒤얽혔던 문제도 해결되었다.

24세의 소장 철학자 ‘니체’를 알게 된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니체’는 일찍부터 그의 음악에 심취하여, '바그너'파(派)의 기수와 같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의 영향하에 있었던 음악가와 독자적인 사고(思考)의 길을 걷는 천재 철학자의 사상은 언젠가 뒤틀리게 되어 있었다.
이것이 발전하여 '바그너' 특유의 공격벽이 ‘니체’를 향하여 뒤얽히고, 마침내 작품 『파르지팔』의 구제사상이 원인이 되어 니체는 통렬한 '바그너' 공격자가 되었다.

종막의 코러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이 설립된 후 '바그너'의 활동은 더욱 왕성해져 갔다.
축전극 『파르지팔』을 완성하는 동안에도 그는 문필활동을 병행했다. 그는 반(反)'바그너' 파에 대한 대항책으로서 《바이로이트 시보》를 강조한 『종교와 예술』을 비롯하여 많은 논문을 발표해 나갔다.

마침내 마지막 작품 『파르지팔』이 완성되어 축제극장에서 초연되었으나 지휘자의 건강이 좋지 않아 제3막 중간부터는 '바그너'가 직접 지휘봉을 잡게 되었다.
이것이 자작(自作) 오페라에 대한 마지막 지휘였고, 그 해 12월 베네치아에서 19세 때의 작품 「제1교향곡」을 지휘한 것이 인생 최후의 지휘였다.

다음 해인 1883년 2월 11일, 『인간성에 있어서의 여성적인 것에 대하여』를 베네치아의 숙소에서 기초하고, 12일 밤은 가족과 단란한 한 때를 보낸 뒤 혼자서 『라이의 황금』의 끝막 코러스를 피아노로 연주했다.
그리고 다음 날 논문을 집필하던 중, 심장발작을 일으켜 세상은 떠났다. 1883년 2월 13일, 그의 나이 70세의 일이었다.

종합예술의 이상

'바그너'는 시와 음악과 무대를 완전히 종합한, 이른바 악극(樂劇)을 창조하려는 데 이상을 두었다.
그러한 투지는 무한 선율이나 지도 동기의 구사, 화성의 표현 능력에 대한 철저한 추구, 확대와 반음계적(半音階的) 화성의 편애, 그리고 대규모적인 관현악법 등 동시대나 후세의 음악에 미친 영향은 압도적이었다.

그는 같은 낭만파인 ‘슈만’이나 ‘브람스’와는 달리 외향적이고 활동적인 천재로 열렬한 숭배자를 많이 가지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너무나 공격적인 성격 때문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까지도 적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따라서 바그너파와 반(反) 바그너파의 대립은 그 후의 음악사의 흐름을 양분할 정도가 되었고, 최근까지 찬반 어느 쪽이든 그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던 음악가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만일 음악면에서만 본다면 '바그너'의 종합예술의 이상은 음악의 고전적인 체계를 완전히 파괴시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