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

G.F. Francesco Verdi

(1813 - 1901, 이탈리아)

10월 10일,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게론코레에서 태어났다. 이 해는 음악가 '바그너'가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여인숙과 식료품점을 경영했고, 베르디는 그 집의 장남이었다. 순회악사의 음악에 이끌린 어린 '베르디'는 마을의 교회에서 오르간을 배웠고 10세 때에는 교회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밀라노에의 동경

이 해부터 '베르디'는 아버지의 친구이자 브세트 시(市)의 부유한 양조업자인 ‘바레치’의 원조를 받아 시의 초급중학에 진학했다. 열렬한 음악 애호가였던 ‘바레치’는 '베르디'의 음악적 재능을 인정하여 음악가 ‘프로베지’ 밑에서 작곡을 배우게 했다.

소년 '베르디'의 기량은 장족의 진보를 나타내어 16세인 1829년에는 교향곡을 쓸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로부터 3년 후, 그는 연령의 제한을 무시하고 밀라노 음악원에 시험을 쳤으나 떨어지고, 하는 수없이 개인교습을 받았다.
그러나 다음 해에 스승인 ‘프로베지’가 세상을 떠나고 그 뒤를 잇기 위해 한때 브세트로 돌아가게 된다.

23세인 1836년, 시(市)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그는 ‘바레치’의 딸 ‘마르게리타’와 결혼하고, 남매를 낳았다. 그는 밀라노에서 상연하기 위한 작곡에 전력을 경주한 끝에 마침내 1838년, 처녀작인 오페라 『오베르토』를 완성했다.

『나부코』의 성공

그러나 『오베르토』의 밀라노 상연 교섭을 아직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 사랑하는 맏딸을 갑작스러운 병마에 빼앗기고 말았다. 슬픔을 잊기 위해 그는 『오베르토』의 상연을 성공시킬 생각으로 가족과 함께 밀라노로 갔다.
스카라좌의 지배인 ‘메렐리’의 도움으로 바라던 『오베르토』의 초연이 실현된 것은 다음 해였다. 대단한 호평을 얻게 되자 ‘메렐리’는 '베르디'에게 3곡의 오페라를 주문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오스트리아의 압정에 대항하는 통일운동이 전개되고 한참 애국심이 고조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이런 사회적 배경에 부추겨져, 1842년에 완성된 『나부코』는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뒤이어 쓰여진 『롬바르디아의 사람들』의 성공 역시도 같은 경우였다.
‘위고’의 원작(原作)에 붙인 『에르나니』는 상연에 앞서서 오스트리아 경찰로부터 내용의 변경을 명령받았다.
그런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오히려 전작(前作)을 능가하는 큰 성공을 거두게 했다. 그 뒤 한동안은 애국적 정열을 담은 오페라가 잇따라 상연되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게다가 34세인 1847년에 상연된 셰익스피어 원작 『멕베드』에 붙인 작품은 작풍(作風)의 대전환을 보여 주어 비로소 원숙기를 예고했다.

춘 희

38세인 1851년에 초연된 『리골레토』는 프랑스 국왕의 배덕 행위를 다룬 내용을 오스트리아 관헌이 문제 삼아 개정 끝에 완성되었는데, 극적 표현의 강화와 관현악법의 진보에 의해 그 때까지의 작풍과는 명백한 선을 긋는 것이었다.
특히 공작이 노래하는 「여자의 마음」은 순식간에 세상에 퍼져서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뒤이어 『일 트로바토레』도 그에게 성공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오늘날 3대 오페라의 하나로 꼽히는 『춘희』의 초연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여주인공이 익살스러운 체구의 가수인데다 내용도 비난 받을 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근대 오페라의 선구자라 할 만한 이 명작도 처음에는 햇빛을 보지 못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VERDI 만세

스웨덴 왕의 암살사건을 주제로 한 『가면무도회』도 그 내용이 검열을 통과하지 못해, 역할을 변경한 끝에 겨우 통과해 예정보다도 1년 늦은 185년에야 로마에서 초연되었다.
이 무렵 사르데냐 왕 ‘빅토리오 에마누엘레’의 이탈리아 통일 운동이 민주의 지지를 얻어 큰 세력을 얻고 있었다.
이탈리아 왕 ‘빅토리오 에마누엘레’의 머리글자를 배열하면 ‘VERDI’가 된다. 그래서 ‘VERDI 만세'라는 말이 통일파 사이에서 많이 사용되었는데, 음악가 '베르디'도 마침내는 이 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46세인 1859년, 소프라노 가수 ‘주제피나’와 결혼한 '베르디'는 다음 해 첫 이탈리아 국회 의원으로 추대되어 5년간 정치생활에 투신한다.
창작활동도 병행하여 페테르부르크 황실 오페라 극장의 의뢰에 의한 『운명의 힘』과 파리에서 초연된 『돈 카를로스』등의 작품을 계속 써나갔다.
그런데 이 시기의 작품은 예전의 애국적인 내용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비극적인 심리주의를 드러낸다.

『아이다』와 『레퀴엠』

1869년의 수에즈 운하 개통을 기념하기 위하여 카이로에 대오페라 극장이 건설되었다.
이집트 왕은 준공 기념오페라를 '베르디'에게 의뢰해왔다. 창작 활동을 중단하고 있던 '베르디'는 이 청탁을 두 번이나 사절했으나 결국은 조건부로 승낙한다.

프랑스의 이집트 학자 ‘마리에트’이 원작에 의한 대작(大作) 『아이다』는 이렇게 해서 완성되었다.

그러나 때마침 일어난 보불 전쟁 때문에 의상이나 배경의 준비가 늦어져 준공기념일에 맞추지는 못했다.
『아이다』는 '베르디' 작품의 장점을 집대성하여 이탈리아 오페라의 새로운 진로를 연 걸작이다.
특히 비약적으로 확충된 관현악부는 성악부와 대등한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1871년 카이로 초연에 이어, 다음 해 그 자신의 지휘에 의해 스카라좌에서 상연되어 절찬을 받지만 한편에서는 '바그너'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점에 대한 비난도 적잖았다.

1873년에는 문호(文豪) ‘만조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레퀴엠』이 완성되어 스카라좌에서 상연되었다. 종교적이기 보다도 대중적인 면이 짙다는 비난을 불러일으켰으나 '베르디'의 이 작품에 대한 극찬은 모든 비난을 제압하고도 남았다.

『오델로』의 대성공

60세를 넘긴 '베르디'는 휴양의 시간 중에도 신작에 대한 의욕은 전혀 쇠퇴하지 않았다.
66세인 1879년, 그는 신진 대본작가인 ‘보이토’를 만나 ‘셰익스피어’의 『오델로』를 오페라화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 뒤 약 7년간에 걸쳐 신중하게 써나간 신작 오페라 『오델로』는 73세인 1886년에 완성되었고 다음 해 2월, 스카라좌에서 초연되었다.

청중은 '베르디'가 『아이다』 이상의 걸작을 완성하여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한 데 놀랐다.
풍성한 선율과 소용돌이치는 관현악은 압도적으로 박력이 넘쳤고, 성악도 극의 내용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었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흥분이 식지 않은 청중들은 호텔 발코니로 '베르디'를 불러내어 환성을 질렀다고 한다.

희극 『팔스타프』

‘보이토’와의 친교는 그 뒤에도 계속되어 ‘셰익스피어’의 원작에 의한 오페라 『팔스타프』의 계획이 두 사람 사이에서 은밀히 진행되고 있었다.
처음으로 써보는 희극(戱劇)에 '베르디'의 마음은 설레고 있었다. 이 작품이 완성되어 80세인 1893년, 스카라좌에서 초연되었을 때 청중은 또다시 놀라고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팔스타프』는 이듬해 파리의 오페라 코미크좌에서 상연되었는데, 이 때가 '베르디' 부부의 마지막 파리행이 되리라는 것은 아무도 예측치 못했다.

1878년, 사랑하는 아내 ‘주제피나’를 잃고 나서 마지막 작품 『성가(聖歌)』 4편을 쓴 '베르디'는 1901년 1월 21일, 밀라노의 한 호텔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나서 일주일 만에 88세의 다채로운 생애를 마친다.
유해는 나중에, 그가 스스로 건설한 ‘음악가 휴식의 집’에 개장(改葬) 되었다.

이탈리아 오페라 최대의 음악가

'베르디'는 '바그너'와 곧잘 비교된다.
두 사람은 같은 해에 태어났고 오페라 사상에 남긴 발자취도 두 사람 모두 그 무게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비중이 크다.
정치적인 행적에 있어서도 이 두 사람은 모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오페라의 방법론에 있어서는 두 사람 사이에 알프스의 남북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베르디'는 목소리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을 따르려고 했다. 애국적인 '베르디'에게 있어서 전통을 버린다는 것은 이탈리아의 통일에 대한 꿈을 저버리는 것처럼 인식되었다.
따라서 그 방법론은 전통적인 오페라에 결여되어 있는 무엇인가를 첨가하여 새로운 종합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면에서 '바그너'는 확실히 '베르디'에게 시사한 것이 많았고, '베르디'이 방법론이 열매를 맺음에 따라 '바그너'의 영향이 인정되기에 이른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베르디'는 애국적인 오페라에 의해 그 이름을 높였다.
오늘날 그가 이탈리아 오페라 사상 최대의 음악가라고 칭송되는 것이 비단 애국적인 오페라 작품 때문만은 아니라 하더라도, 애국적 오페라를 쓸 수 있었던 역사적·사회적 환경에 속한 '바그너'와 비교해 보면 '베르디'는 행운이 있는 편에 속했던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