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

Johannes Brahms

(1833 - 1897, 독일)

‘브람스’는 엘베 강 하구가 바라다 보이는 독일 최대의 항만 도시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극장 관현악단 콘트라베이스 주자였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음악을 배워 재능을 과시하였고 7세 때부터는 마을 교사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10세에 당시 함부르크 제일의 음악가라고 일컬어지던 ‘마르크스젠’에게서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다.

성년이 되어 가난한 가계를 돕기 위해 편곡이나 술집 피아니스트로서 일을 하는 동안 브람스는 창작에 뜻을 두기 시작한다.

최초의 연주여행

17세인 1850년, 세 살 손위인 바이올리니스트 ‘레메니’를 알게 되었는데, 그녀와의 만남은 그의 생애의 한 전기를 마련한다.

1853년, 두 사람은 최초의 연주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여행 도중에 하노바에서 ‘레메니’의 친구 ‘요제프 요아힘’을 알게 되어 그와도 친교를 맺었다. 대(大)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은 훗날까지도 브람스의 좋은 조언자로서 평생 변함없는 우정을 보여 준다.

두 사람은 ‘바이마르로 리스트’를 찾아갔지만 ‘리스트’와 '브람스'의 음악은 상당히 이질적이어서 서로 비판적일 수밖에 없었다.
훗날 ‘리스트·바그너 파'와 '브람스 파'의 대립 요인은 이미 이때부터 싹텄다고 보아진다.
이러한 일로 기분이 상한 '브람스'는 연주여행을 중단하고 ‘요아힘’의 소개로 뒤셀도르프로 ‘슈만 부부’를 찾아갔다.

'슈만'과의 만남

‘슈만 부부’는 청년음악가 '브람스'를 따뜻이 맞아 주었다.
'브람스'의 비범한 재능을 인정한 ‘슈만’은 평론 <새로운 길>을 《신음악 시보》지상에 발표하여 '브람스'를 세상에 소개하는 한편 작품을 출판하도록 적극적으로 협력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겨우 성공의 길을 걷게 된 '브람스'는 다음 해, '슈만'이 라인강에 투신했다는 비보를 접하고 뒤세도르프로 달려가 '슈만'의 부인 ‘클라라’와 자녀들을 위로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클라라’와의 친교는 평생 동안 계속되었다.

24세인 1857년부터는 ‘데 트몰트’의 궁정음악가로서 근무하며 「피아노협주곡 제1번」을 비롯한 작품군을 완성했다.
그러나 이 협주곡의 초연은 좋은 평을 얻지 못했고, 이곳에서 알게 되어 장래를 맹세했던 ‘아가테’와의 혼약마저도 파기되어 실의에 빠진 그는 1859년, 함부르크로 돌아가게 된다.
그 뒤 한동안은 합창의 지휘와 창작에만 몰두했으나 29세인 1862년에 마침내 ‘빈’으로 이주할 결심을 굳히게 된다.

어머니의 죽음과 「레퀴엠」

빈으로 옮긴 뒤에는 창작도 연주 활동도 활발해져서 착실하게 지위를 확보하고, 평온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1865년 2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받고 함부르크로 달려 갔으나 임종에는 맞추지 못했다. 이 슬픈 경험이 '브람스'의 「레퀴엠」 완성의 결의를 새롭게 했다.

35세인 1868년, 「레퀴엠」은 제5악장을 제외한 전곡이 그 자신의 지휘로 부레멘에서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일약 명성을 얻었으며, 「헝가리의 무곡」의 출판(1869년)도 호평을 받았다.

「제1교향곡」

39세인 1872년, 부친의 사망을 계기로 그는 고향 함부르크와의 인연을 끊고 빈에서의 활동에 몰두하였다. 그는 빈의 악우협회(樂友協會) 예술감독으로 취임하여 바쁜 나날을 보냈다.
바쁘고 보람된 일은 창작에 큰 자극을 주어 「하이든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비롯한 명작이 잇따라 완성되고 있었다. 교류영역도 넓어져서 '브람스'는 빈의 음악활동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갔다.

한편 ‘베토벤’의 뒤를 잇는 교향곡의 완성에 대한 소망이 또다시 그의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는 42세인 1875년 때, 공직을 사퇴하고 「제1교향곡」에 몰두한 끝에, 거의 21년의 세월에 걸쳐 대교향곡을 완성하였다.

열매 맺은 장년기

충실한 창작 활동은 그 뒤에도 중단되는 일 없이 계속되어 「제2교향곡」, 「바이올린 협주곡」, 「대학축전 서곡」, 「피아노협주곡 제2번」,「제3교향곡」 등의 대표적 걸작이 잇따라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왕성한 장년기도 「제4교향곡」과 「2중협주곡」으로 전환기를 맞이한다. 창작력의 쇠퇴를 의식한 '브람스'는 대작에서 손을 떼고 실내악이나 구작(舊作)의 개편에 주안점을 두기 시작한다.

58세인 1891년에는 약식으로 유서도 작성했다.
그러나 그 시기에 알게 된 클라리넷의명수 ‘필펠트’는 그의 창작에 마지막 불을 질러 명작 「클라리넷 5중주곡」을 탄생시켰다.

빛나는 해와 고독한 만년

62세인 1895년에는 그에게 가장 빛나는 한해였다.
5월에 황제로부터 ‘예술과 과학에 대한 대훈장’을 수여받은 데 이어 9월에는 마이닝겐의 새 연주회장에서 ‘바흐’, ‘베토벤’, '브람스'의 작품에 의한 기념연주회가 열렸던 것이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가정을 가지지 않은 거장(巨匠)의 만년은 너무나도 고독했다.
체력의 쇠퇴가 간암(肝癌) 때문이란 판명이 내려졌을 때는 이미 절망적인 상태였다.
두서넛의 친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한 것은 1897년 4월 3일, 64세가 되는 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