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6일, 카레보에서 태어났다. 카레보는 프스코프 현의 도시로서 '무소르크스키' 가(家)는 대대로 이 고장의 대지주였다. ‘모데스트’는 우수한 사관생으로서 특히 역사와 독일철학에 심취했으며 재학중에도 피아노로 자선연주회에 출연하는 등 상당한 솜씨를 보이고 있었다.
국민음악파에 공명
17세인 1856년,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에 배속된 ‘모데스트’는 그곳에서 연대의 군의(軍醫)로 근무하고 있던 작곡가 ‘보로딘’을 알게 된 것이 생애의 전기가 된다.
따라서 교수법도 꽤 분방한 것이어서 ‘무소르크스키’의 날카로운 감수성과 다부진 독창성은 유감없이 발휘되지만 전통적인 작곡법과는 평생 인연이 없게 되었다.
러시아 '5인조'의 결성
해군 사관인 ‘코르사코프’가 이 일단에 가담하면서 러시아 국민악파의 이른바 ‘5인조’가 결성되었고, 평론가 ‘스타소프’의 지지를 얻어 활동을 개시했다.
그러나 1861년, 농노해방령에 의해 생가(生家)가 몰락하자, 생계를 위해 교통성의 관리생활로 들어간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교향시 『민둥산의 하룻밤』의 제1곡 「마녀들」을 비롯하여 20여 곡의 개성 있는 가곡이 있다.
『보리스』의 완성
'무소르크스키'가 완성한 유일한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는 ‘푸시킨’의 원작에 붙인 걸작으로서, 1898년에 착수되어 2년 뒤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여주인공이 등장하지 않는 이 파격적인 오페라는 상연을 거부당하고 만다.
『보리스』의 개정판 상연은 ‘서구파’를 지지하는 비평가들이 방해를 받아 좀처럼 실현되지 않았으나 35세인 1874년의 1월, 마침내 마린스키 극장에서 전곡이 상연되었다.
걸작시대로부터의 전락
어쨌든 『보리스』의 완성과 상연은 그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보리스』에 이어 1872년부터 쓰여진 오페라 『호반시치나』이 제2막도 완성되었으나 ‘쿠투조프’의 결혼으로 다시 고독한 생활에 빠진 그는 급속히 창작 의욕을 잃고 술에 젖은 나날을 보내게 된다.
비참한 만년
옛 동료를 잃은 뒤 명성마저도 사라진 가운데 고독한 생활을 보내던 '무소르크스키'를 위로해준 것은 ‘클린카’의 여동새 ‘셰스타코바’ 부인과 가수인 ‘레오노바’ 부인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소로틴스크의 시장」의 일부를 완성했으나 41세인 1880녀에 관리 생활을 그만둔 뒤로는 더욱 술에 파묻혀 살게 되었다.
대담 솔직한 독창성
전통적인 작곡 기법을 몰랐던 '무소르크스키'는 이를테면 아마추어 작곡가로서 작품의 수도 많지 않을 뿐더러 그나마 미완성 작품이 많다. 그의 미완성 작품을 완성하거나 개정하여 널리 소개한 것은 친구인 ‘코르사코프’였다.
『전람회의 그림』도 ‘라벨’의 뛰어난 관현악 편곡에 의해 애호되고 있지만 종종 원작 그대로의 독창적인 매력이 재인식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