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코프스키

Pyotr Ilyich Tchaikovsky

(1840 - 1893, 러시아)

5월 7일, 보트킨스크에서 태어났다.
이 해에는 문호 ‘졸라’와 인상주의 화가 ‘모네’가 태어났으며, 아편전쟁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광산 기사인 아버지는 음악애호가였고 어머니는 피아노에 상당한 실력을 지님과 동시에 아름다운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표트르'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적 재능과 함께 문학적 감수성도 뀌어나 7세 때 이미 프랑스 어로 시를 썼다고 한다.
1848년, 부모와 함께 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배우고 다음 해부터는 작곡 공부를 시작했다.

관청 근무에서 음악 학생으로

그러나 부모는 그를 음악가로서 세상에 내놓을 확신이 서지 않아 법률학교에 입학시켰다.
법률학교 재학 중 ‘컨딩게르’에게서 피아노와 이론을 배웠으나 졸업한 후 법무성에 근무하면서부터 관리생활과 음악에의 정열이라는 모순 속에서 고민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때마침 1860년에 ‘안톤 루빈스타인’이 페테르부르크에 음악교실을 개설하여 '차이코프스키'는 관청에 근무하면서 이곳에서 ‘자렌바’ 교수에게서 이론을 배웠다.

그의 나이 22세인 1862년에 이 교실이 러시아 최초의 음악원으로 승격되자 그는 그대로 음악원 학생으로 남았고, 다음해에는 법무성을 그만 두고 음악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 음악원에서는 독일음악에 뿌리박은 유럽의 전토음악에 대한 교육이 실시되는데 반해 그의 최초의 관현악곡 『뇌우』나 졸업작품 『환희의 송가』는 '바그너'나 ‘5인조’의 음악에 가까운 작풍(作風)이었기 때문에 ‘루빈스타인’의 호감을 사지 못했다.

국민주의와의 교류

1866년, '차이코프스키'는 ‘안톤’의 동생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이 설립한 모스크바 음악교실의 강사로 초빙되어 취임했다.
이 해에 모스크바에서의 첫 작품으로 「교향곡 제1번」이 쓰여졌고 2년 뒤에는 ‘니콜라이’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이 작품은 국민주의적 작품으로서 높이 평가되었는데 이것을 계기로 ‘발라키레프’를 알게 되었고 다시 ‘5인조’의 음악가들과도 친교를 맺게 되었다.

‘발라키레프’의 민요풍은 '차이코프스키'에게 큰 자극이 되어 이 무렵의 작품로는 민요적인 수법을 사용한 「현악4중주곡 제1번」, 「교향곡 제2번」, 셰익스피어에게서 영감을 얻은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 환상곡 『템페스트』 등이 쏟아져 나왔다.

그의 이름은 이 시기에 이미 국외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유럽음악의 기법을 충분히 구사하여 독자적인 러시아 예술을 창조하려고 한 '차이코프스키'는 이윽고 ‘5인조’의 사상과도 대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도 「피아노협주곡 제1번」은 한발 진전을 보여 준 명작이며 ‘한스 폰 뷜로’에 의한 보스턴 초연은 '차이코프스키'의 이름을 일약 세계적으로 부상시켰다.
뒤이어 나온 발레 『백조의 호수』와 『슬라브 행진곡』도 큰 성과를 얻게 되지만 모스크바 시대는 뜻하지 않은 결말을 고하게 된다.

불행한 결혼

37세인 1877년, '차이코프스키'는 예전의 제자였던 ‘안토니나 미류코바’와 결혼하지만 그의 음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부인은 그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일 뿐이었다.
내성적인 '차이코프스키'는 이 때문에 심한 신경병 증상을 나타내어 투신자살까지 꾀한 끝에, 2개월 만에 결혼생활은 파탄나고야 만다.
그 뒤 스위스로 가서 요양하는 동안에 경제적 원조에 의해 '차이코프스키'의 생활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메크 부인이 원조

모스크바 시절의 '차이코프스키'는 주(週) 30시간의 강의와 박봉에 허덕이고 있었다.
철도 경영자의 미망인 ‘메크’ 부인은 평소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 무척 호의적이었던 사람으로 이 시기에 그에게 연 6천 루불의 원조를 제의해 왔다.

이 연금의 원조는 그 뒤 13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으나 두 사람은 단 한 번 우연히 만난 것 외에는 서신에 의해서만 교제하였다.
이러한 제의에 힘을 얻은 '차이코프스키'는 교직을 떠나 전적으로 창작에 몰두하여, ‘메크’ 부인에게 바쳐진 「교향곡 제4번」을 필두로 한 새로운 창작기에 들어갔다.

오페라 『에프게니 오네긴』과 「바이올린 협주곡」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명작이다.
그 사이에 몇 번의 외국여행도 시도되었는데 『이탈리아 카프리치오』는 여행 중 얻은 산물의 하나였다.

충실한 장년기와 갑작스러운 죽음

45세인 1885년부터는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가 가장 충실한 활동기로 접어든다.
이 시기의 첫 작품 「만프레드」를 비롯해 「교향곡 제5번」, 『잠자는 숲속의 미녀』, 『스페이드의 여왕』이 잇따라 완성되었고 1886년 이후에는 지휘자로서의 연주활동도 전개되어 유럽 각지에의 연주여행도 활발해졌다.

그러나 명성이 높아질수록 그의 건강은 과로 때문에 악화되고 있었다. 게다가 1891년에 ‘메크’ 부인의 원조가 단절되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발레 『호두까기 인형』의 완성 후에는 「교향곡 제6번」의 완성에 힘써서 1893년, 그 자신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초연 뒤 그는 동생 ‘모데스트’와 의논하여 이 야심작을 『비창』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로부터 8일 뒤, 그는 콜레라가 원인이 되어 갑자기 타계하고 말았다. 1893년 11월 6일의 일이다.

모스크바 악파의 아버지

'차이코프스키'의 독자성은 러시아 음악을 유럽의 전통음악과 결합시키면서 친숙하게 민족적 예술 음악으로 창조한 점에 있다.
이 때문에 '무소르크스키' 등의 국민 악파와 대립된 모스크바 악파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그는 '무소르스키'와 함께 오늘날 러시아 국민음악을 발전시킨 거장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는 다방면에 걸쳐서 작품 활동을 했지만 교향곡 부분에서 가장 왕성했다.
'보로딘'과 더불어 러시아 교향곡의 주류를 형성함과 동시에 극적인 악상의 전개는 '베토벤'의 교향곡 사상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의미에서의 통속성과 예술성을 지닌 그의 음악은 가장 널리 애호되는 클래식 음악 중 하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