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보르작

Antonin Dvorak

(1841 - 1904,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 근교의 넬라호제베스(뮐하우젠)에서 태어났다.
이 해에는 상징파 시인 ‘말라르메’가 태어나고 '바그너'가 『리엔치』를 초연하여 승리를 거둔 해이기도 하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던 아버지는 5남 3녀 중의 장남이었던 그에게 가업을 잇게 할 생각으로 13세 때부터 ‘A. 리만’에게 보내어 독일어를 배우게 했다. ‘리만’은 유능한 음악가이기도 했다.
안토닌은 그에게서 어학 외에 악기에 대한 이론과 작곡을 배우며 음악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프라하의 음악수업

16세인 1857년, 다행히 친척의 경제적 원조를 받으면서 프라하의 오르간 학교에 입학하여 기초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18세인 1859년에 졸업 후, 한동안은 일정한 직업을 가지지 못해 고통스러운 생활을 이어가는 동안에도 '드보르작'은 작곡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베토벤을 연구하면서 실내악이나 교향곡 습작에 열중했다.

그 무렵 선배 ‘스메타나’는 민족음악운동을 시작하여, 1862년에는 국민극장의 가극장(歌劇場) 관현악단을 발족했다.
'드보르작'이 이 관현악단에서 비올라 주자로 있으면서 ‘스메타나’의 민족오페라를 연주한 체험은 그이 창작의욕을 크게 자극했다.
또한 새로 접하게 된 '바그너'와 '리스트'의 음악은 그 때까지의 창작태도를 진지하게 돌아보게 했다.

『찬가(讚歌)』의 성공과 결혼

오페라에 심취하게 된 '드보르작'은 『알프레드』를 비롯한 몇 개의 오페라를 썼으나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만다.
오페라 외에도 「교향곡 제1번」, 「제2번」과 여러 곡의 현악4중주곡이 완성되었는데, 31세에 완성한 혼성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찬가(讚歌)』가 성공을 거두어 마침내 세상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 같은 성공은 진작부터 연정을 품고 있던 가수 ‘안나’와의 결혼까지도 가능하게 했다.
이것을 기회로 극장관현악단의 비올라 주자를 그만두고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취임, 보다 많은 창작 시간을 가지게 되면서 그의 창작활동은 왕성하게 전개되어 간다.

활짝 열린 영광의 길

34세인 1875년, 오스트리아 정부 장학자금의 시험을 쳐서 심사원인 ‘브람스’와 ‘한슬릭’에게 인정을 받으면서 합격하여, 유럽 악단에 찬란한 첫 걸음을 내디뎠다.
'브람스'는 '드보르작'의 특유의 슬라브양식을 높이 평가했고 이후 두 사람은 평생 변하지 않는 우정으로 맺어졌다.

결혼을 하고 나서 이미 「제5번」까지의 3곡의 교향곡, 「현악세레나데」, 『모라비아 2중창곡』 등의 민족적 작품을 완성해 온 그에게, 출판사 ‘짐로크’로부터 『슬라브 무곡』의 의뢰가 있었다.
이것도 '브람스'의 천거에 의한 것으로서 37세인 1878년에 출판된 그 「제1집」은 '드보르작'의 이름을 일약 세상에 떨치게 했다. 특히 영국에서 평이 좋았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1884년을 기점으로 영국으로의 연주여행이 자주 이루어졌다.

이런 순탄함 속에서 슬픈 사건이 있었다. 장녀를 포함한 세 아기의 잇따른 죽음이었다.
「스타바트 마테르」는 이런 슬픔 가운데서 나온 칸타타로서 초연은 각지에서 모두 대성공을 거두었다.
계속해서 오페라를 썼으나 별로 호평을 받지 못했고 걸작 「교향곡 제8번」과 독자적인 형식에 의한 피아노3중주곡 『둠키』가 슬라브적 색채가 짙은 이 시기에 정점을 이루고 있다.

신세계 미국으로

49세인 1890년부터 다음 해에 걸쳐서는 다시 슬라브 시대의 최후를 장식하는 영광의 해로서, 각지로부터 칭호와 훈장 증여가 있었고 프라하 음악원의 교수로도 취임했다.

그리고 51세인 1892년, 미국 내셔널음악원의 초청으로 조국을 떠나 음악원장으로 취임하여 새로운 미국시대로 들어서게 된다.
이 음악원은 인종차별을 하지 않아 그가 흑인성가에 눈을 돌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흑인이나 인디언 음악과 슬라브 음악의 멋진 결합이 도미(渡美) 후의 첫 작품인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에서 이루어졌다.

이 곡은 미국인의 호의에 대한 보답의 뜻도 담겨 있어서 그 초연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국에서의 성공은 고국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켜 『아메리카』 4중주곡, 「첼로협주곡」 등 흑인의 애수와 보헤미아에의 향수를 담은 명작이 불과 2년 사이에 잇따라 완성되었다.

만년(晩年)

54세인 1895년,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드보르작'은 프라하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창작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교향시를 중심으로 하는 이 시기의 작풍(作風)은 '바그너'나 ‘리스트’ 풍의 것으로서 새로운 맛이 없었다.

마지막 작품이 된 오페라 『아르미다』는 결국 실패작으로 끝났다.
마침내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1904년 5월 1일, 63세를 일기로 프라하의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국제적인 민족주의 음악

체코의 민족주의 음악은 ‘스메타나’에 의해 개척되고 '드보르작'에 의해 국제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나 교향시와 오페라에 민족주의 리얼리즘을 내놓은 ‘스메타나’에 대해 '브람스' 풍의 신고전주의(新古典主義)를 지향한 '드보르작'의 민족주의는 스스로 상이한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도미(渡美) 중에 인디언이나 흑인 음악에 동정과 공감을 느껴 쓴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와 「첼로협주곡」에 특히 그러한 느낌이 강하다.
미국에서는 적극적인 체코 민족음악의 울림을 들을 수 없지만, 향수의 감미로움에 대한 도취를 엿볼 수가 있다.

이러한 절충적 민주주의가 그의 음악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들기도 했지만 국제인이기를 원치 않았던 '드보르작'에게 있어서는 본의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의 진면목은 역시 「교향곡 제8번」이나 피아노3중주곡 『둠키』 등의 구성적인 작품에서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가 열중한 오페라 분야에서 걸작을 낳지 못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