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

JJoseph Maurice Ravel

(1875 - 1937, 프랑스)

3월 7일, 시브르에서 태어났다. 시인 '릴케'와 '토마스만'이 이 해에 태어났고 작곡가 '비제', 시인 '뫼리케'가 사망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대단한 음악 애호가로서 '모리스'를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와 하성 선생에게 맡겨 작곡을 익히게 하였다.

14세인 1889년, '모리스'는 파리 음악원 피아노 예과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음악공ㅂ를 시작한다. 2년 뒤에는 본과로 진학하여 피아노 외에 화성법을 배웠는데 이 무렵에 '샤브리에나 사티' 등의 반(反) 아카데미적인 작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22세인 1897년, '포레'에게 사사하게 되면서 이 경향은 더욱 강해지고 1899년에는 이색적인 작품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영광스러운 로마상 낙선

26세인 1901년, 로마상 콩쿠르에 응모하여 2등으로 입선한 뒤 재차 시도했으나 모두 낙선했다. 당시 그는 이미 『물의 유희』와 「현악4중주곡」을 비롯한 독자적인 작품에 의해 신진 작곡가로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이 낙선 사건은 저널리즘에서 크게 떠들어, 끝내는 음악원 원장의 경질로까지 발전했다.
이 사건은 당시 악단의 완고한 보수성을 폭로함과 동시에 귀재 ‘라벨’의 이름을 높이는 결과가 되었다.

   ☞ 인상주의의 본가 다툼

학창시절이 ‘라벨’은 결코 우등생은 아니었으나 ‘말라르메나 포우’를 애독(愛讀)하고 동료들과 새로운 예술의 경향에 대해 열심히 토론을 벌이는 청년이었다.
음악가로서는 특히 ‘드뷔시’를 존경하여 「목신의 오후」의 전주곡을 음악 사상 최대의 걸작으로 인정했다. 이러한 생각으로 ☞ 인상주의의 작풍은 당시의 그의 작품에 크게 반영되었다.
그러나 피아노 음악만을 생각한다면 명작 『물의 유희』에 나타난 획기적인 기법이 이미 ‘드뷔시’보다도 한걸음 앞서 있었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런 까닭에 주위의 비평가나 음악가들은 두 사람 가운데 누구를 ☞ 인상주의의 본가로 삼을 것인가를 두고 진지하게 논쟁을 벌였을 정도이다.

이러한 주위의 생각이야 어떻든 ‘라벨’의 음악적 감각은 분명히 ‘드뷔시’와는 이질적(異質的)인 것이었다.
30세에 피아노곡 『거울』 이후의 작품에서 강하게 표출되어 온 독자적인 작풍은, 몽롱한 ☞ 인상주의의 분위기보다는 오히려 프랑스 고전음악의 명확하고 간결한 형식의 경향을 나타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대전 후의 변모

1914년의 세계 대전 발발까지 그의 창작활동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새 음악의 기수로서 그의 사회적 위치도 점점 더 확고하게 다져졌다.
이 10년 정도의 기간에 쓰여진 약 20여 곡의 작품은 모두가 한결같은 걸작이며 특히 러시아 발레단의 주재자 ‘디아길레프’를 위해서 쓰여진 발레음악 『다프니스와 클로에』는 이 시기 창작의 정점을 이루었다.

전후(戰後)의 파리 악단에는 ‘미요나 오네게르’등 젊은 세대의 대두가 현저하여 새 음악의 기수는 이미 ‘라벨’이 아니라 ‘프랑스의 6인조’의 이론적 지도자였던 시인 ‘장 콕토’로 대체되어 갔다.
고난의 길은 여전히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가곡집 『마다가스카르 섬의 토인의노래』와 1932년에 쓰여진 왼손 및 두 손을 위한 2개의 「피아노협주곡」에 담겨진 소름이 끼칠 정도의 박력은 그 때까지의 고난에 찬 도전을 연상케 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모전자전의 스페인 기질

한편, 전쟁 말기부터 그의 작품 연주회가 각지에서 열리게 되면서 지휘자로서의 연주활동이 갑자기 활발해졌다.
자작의 연주를 통해 직접 청중의 반응에 부딪치는 귀중한 체험은 당연히 창작활동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발레곡 「볼레로」의 성공은 이러한 체험을 충분히 반영한 것이었다.
본래 ‘라벨’의 성격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스페인 기질이 강해서 이미 『스페인 광시곡』이나 「하바네라」 등이 성공을 거둔 바 있었다. 「볼레로」 역시도 이러한 성격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1933년경부터 라벨은 신경계의 이상이 심해져서 뇌수술을 받았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파리에서 62세의 생애를 마쳤다.

   스위스의 시계 직인

‘스트라빈스키’는 ‘라벨’의 꼼꼼한 작풍을 아버지 쪽의 스위스 혈통에 빗대어 그를 ‘스위스의 시계 직인’에 비유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라벨’은 창의성이 결여된 음악가는 아니었다. 음악사상 드물게 보는 귀재(鬼才)이고, 위재(偉才)이기도 했다.

연상인 ‘드뷔시’와 함께 인상주의 수법에서 출발했지만 ‘드뷔시’가 평생 이 수법에 거로 독자적인 세계에 파묻힌 데 비해 ‘라벨’은 일찍부터 인상주의의 한계를 꿰뚫어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지적(知的)인 작풍(作風)에는 이미 그 뒤의 음악사의 경향을 예지케 하는 요소가 적잖이 발견된다.

그러나 그 창작의 전성기가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해 중단된 것은 비극이었다.
그 때문에 인상주의를 극복한 새로운 작풍을 스스로의 손으로 개척하지 못하고 오로지 정교하고 치밀한 작품에 몰입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