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벨리우스 Jean Sibelius (1865 - 1957, 핀란드) |
타바스테프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핀란드인으로 군의였고, 어머니는 스웨덴의 혈통을 이어받은 여성이었다.
어려서부터 피아노늘 익히고 10세 때에 작곡을 시작했으나 특별히 음악적 재능을 보이지 않다가 15세 때 군악대장으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재능을 나타냈다.
그 뒤 음악이론을 거의 독학으로 배우면서 작곡에 정진했으나 부모의 권유에 따라 29세에 헬싱키 대학 법과에 입학했다.
본격적인 음악수업 개시
대학 입학과 동시에 헬싱키 음악원의 'M. 베겔리우스'에게서 본격적인 작곡법을 배운 끝에 대학을 중퇴하고, 음악원에 적을 두고 작곡과 바이올린을 배웠다.
24세인 1890년에 음악원을 졸업, 장학금으로 외국 유학의 길을 떠났다.
유럽 유학
그는 먼저 베를린으로 가서 ‘A. 베커’에게
☞ 대위법 을 배웠다. ‘R. 슈트라우스’의 『돈 환』과 그 밖의 새 음악에 의해 크게 변환을 가져오게 된 것이 이 시기였다.
가곡을 비롯하여 이 시기까지의 그의 작품은 아직까지도 독자적인 양식을 봉 주지 않지만 대작 교향시 『클레르보』의 스케치는 이미 개시되고 있었다.
헬싱키 음악원의 교수
27세인 1892년에 귀국하자 곧 모교의 작곡, 바이올린 교수로 취임하였고, 약혼녀인 ‘예르테플트’ 대장의 딸 ‘아이노’(작곡가 예르네폴트의 여동생)와 결혼생활에 들어갔다.
특히 오늘날에도 곧잘 연주되는 4개의 『전설곡』, 교향시 『핀란디아』 등의 명작은 민족적 작곡가로서의 '시벨리우스'의 지위를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파리 만국박람회
1900년,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이 기회에 초청을 받은 '시벨리우스'는 지휘자 ‘R. 카누스’와 함께 관현악단을 이끌고 파리를 비롯하여 스톡홀름, 오슬로, 코펜하겐, 함부르크, 베를린, 암스테르담, 헤이그, 브뤼셀 등 각지를 방문하여 자신이 작곡한 곡을 지휘했다.
이미 한 해전에, 「교향곡 제1번」을 완성하고 있던 그는 만국박람회 다음 해인 1901년에 역작 「교향곡 제2번」을 완성했는데, 마침내 그것이 독자적인 작풍을 발휘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독자적인 양식을 완성
1915년, 그의 탄생 50주년은 온 국민으로부터 축하를 받았고 연금은 오천 마르크로 증액되었다.
52세인 1917년, 10월 혁명에 의해 제정러시아는 붕괴되고 핀란드는 오랜 압정에서 벗어나 공화국 독립을 선언했다.
다음 해, '시벨리우스' 탄생 60주년이 되는 해부터는 탄생을 축하하여 2만 7천 마르크의 돈이 모금되었다고 한다. 탄생 70주년에도, 80주년에도 국가적인 축제가 베풀어졌고 1957년, 92세의 장수르 누린 이금세기 최대의 교향곡 작가는 영광과 명성으로 장식된 행복한 일생을 헬싱키에서 마감했다. 1957년 9월 20일의 일이다.
현대의 민족적 낭만주의
20세기의 음악가에 속하면서도 시벨리우스의 작품은 이른바 현대음악과는 꽤 먼 인상을 준다.
그러나 교향곡 「제7번」에 최고의 결정을 나타낸 이 구성 원리를 개척함에 있어서 그는 완고하리 만큼 주위의 영향을 거부해 왔다.
그 결과 그의 음악어법은 뜻하지 않게 현대인에게도 큰 감명을 주었고 자칫 잊어버리기 쉬운 현대음악의 한 존재양식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당시 음악원의 피아노과 교수는 절은 'F. 부조니'였는데 그 뒤 두 사람의 친교는 부조니가 죽을 때까지 계속 되었다.
이어서 빈으로 가서 ‘K. 골트마르크’, ‘R. 후카스’에게 배우면서 동시에 '브람스'와 그 밖의 음악가들과도 사귈 수 있었다.
이 해에는 민속적 대서사시 「칼레빌라」에 의한 교향시 『콜레르보』가 완성, 초연되어 크게 인정을 받았다. 이어서 교향시 『엔 시가』(1901년 개작), 모음곡 『케렐리아』가 완성 발표되는 등 왕성한 창작활동이 전개되었다.
그 사이 1897년에 국회는 그에게 연금 2천 마르클ㄹ 줄 것을 결의했다. 그것을 계기로 거의 5년간의 교수생활을 떠나 자유로운 활동기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약 4년간 귀를 앓게 되어 39세에, 헬싱키 교외로 거처를 옮기고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조용한 창작생활을 보내게 된다.
작풍에도 내성적인 경향이 나타나 44세에 현악 4중주곡 『친근한 목소리』와 「교향곡 제4번」은 이러한 면을 반영하게 된다. 물론 유럽제국과 미국에의 연주여행은 이 사이에도 자주 행해져서 세계적인 대작곡가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교향곡 제5번」도 이 해에 완성되어 탄생 축하음악회에서 초연되었다. 그러나 명작교향곡 「제4번」 이후 전통적인 유럽의 음악 양식을 떠나 독자적인 양식의 완성을 지향하고 있던 그는 이 곡에 만족할 수 없었다.
대폭적인 수정이 가해지고 있는 동안에 다음 교향곡 「제6번」, 「제7번」이 구상되어 갔다.
그러는 동안 세상은 불안정하여 '시벨리우스'도 창작을 일시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윽고 안정된 생활로 회복됨과 동시에 다시 창작이 진행되어 교향곡 「제6번」, 「제7번」이 잇따라 완성되었다. 두 곡 모두 명작이지만 특히 「제7번」은 독자적인 형식에 표현의 모든 가능성을 담은 최고의 걸작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국가와 국민으로부터 이토록 경애받고 지지를 받은 음악가는 아마 드물 것이다.
핀란드의 민족성과 푸토성에 깊이 뿌리박은 그의 음악은 오히려 후기 낭만파의 음악을 이어받아 한층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래 민족주의의 음악은 낭만파 음악의 중요한 지류(支流)의 하나였으나 '시벨리우스'는 이 민족적 낭만주의에 매우 독특한 구성원리를 부여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인상주의 이후의 눈부신 유럽음악계의 움직임에 대해 '시벨리우스'만큼 무관심할 수 있었던 음악가는 드물다.
그의 음악이 가지고 있는 유례 없는 내명성은 이러한 창작 태도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